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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

우여곡절 끝에 완공…궁(宮)금한 '경복궁 중건' 이야기

by 준~ 2023.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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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완공…궁(宮)금한 '경복궁 중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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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랜드마크, 외국인들이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기억하는 곳. 바로 경복궁이다.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외국인들이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기억하는 곳. 바로 경복궁(景福宮)이다. 1395년(태조 4) 9월 태조의 왕명을 받은 정도전이 주도하여 완성한 경복궁의 처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755칸 규모로 출발한 경복궁은 이후에 계속 건물이 증축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폐허로 남았다. 그리고 270여 년이 지난 후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1808~1890)의 뜻을 받드는 형식으로 경복궁 중건 사업이 시작되었다. 왕실의 위상과 권위를 회복하려는 흥선대원군의 의지 때문이기도 했다.
경복궁 중건 사업이 시작됐다. 
신정왕후의 뜻이기도 하지만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흥선대원군의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

경복궁 중건 사업의 시작

경복궁의 중건 사업의 시작은 1865년(고종 2) 4월 2일 조대비의 하교에서 비롯되었다. 

조대비는 전교를 내려, “경복궁은 우리 왕조에서 수도를 세울 때 맨처음으로 지은 정궁(正宮)이다. 규모가 바르고 크며 위치가 정제하고 엄숙한 것을 통하여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을 우러러 볼 수 있거니와 정령(政令)과 시책이 다 바른 것에서 나와 팔도의 백성들이 하나같이 복을 받은 것도 이 궁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란에 의하여 불타버리고 난 다음에 미처 다시 짓지 못한 관계로 오랫동안 뜻있는 선비들의 개탄을 자아내었다.”고 말하였다. 
신정왕후의 뜻에 따라 경복궁 중건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돌이켜보면, 익종(翼宗)께서 정사를 대리하면서도 여러 번 옛 대궐에 행차하여 옛터를 두루 돌아보면서 개연히 다시 지으려는 뜻을 두었으나 미처 착수하지 못하였고, 헌종(憲宗)께서도 그 뜻을 이어 여러 번 공사를 하려다가 역시 시작하지 못하고 말았다.” 고 하여, 경복궁 중건이 자신의 남편인 익종(효명세자)의 유지를 따르는 것이기도 함을 선언하였다.

이어서 조대비는 “아! 마치 오늘을 기다리느라고 그랬던 것 같다. 우리 주상은 왕위에 오르기 이전부터 옛터로 돌아다니면서 구경하였고 근일에 이르러서는 조종조(祖宗朝)께서 이 궁전을 사용하던 그 당시의 태평한 모습을 그리면서 왜 지금은 옛날처럼 못 되는가 하고 한탄한다. 이것은 비단 조상의 사업을 계승한다는 성의(聖意)일 뿐만 아니라 넓고도 큰 도량까지 엿볼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백성들의 복이며 국운의 무궁할 터전도 실로 여기에 기초할 것이다. 내 마음은 경사와 행복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하여 경복궁 중건에 임하는 감격을 표시하였다.

조대비의 하교 후에 경복궁 중건 사업을 담당할 임시 기관인 영건도감(營建都監)이 구성되었고, 중건 시작일은 4월 13일로 정하였다.

4월 5일의 하교에서는 “어제와 오늘 이틀 사이에 모인 원납전(願納錢)이 10만 냥에 달하고 선파(璿派:종친)들이 보조한 돈도 몇만 냥이 넘는다고 한다. 이것을 미루어보면 이 공사가 하늘의 뜻과 백성의 마음에 부합된다는 것을 알 수 있거니와 나라를 위하는 우리 백성들의 성의도 융성하던 옛날에 비하여 부끄럽지 않다.”고 하여 자발적 기금인 원납전이 10만 냥에 달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원납전은 말이 원해서 납부한 돈이지, 실제로는 강제 기부금의 성격이 커서 ‘원망하며 납부한 돈’이란 뜻으로 원납전(怨納錢)으로도 불렸다.

공사에 참여한 인원이 부족하자 승려들을 충당하기도 했다. 1865년 5월 영건도감에서는 “공장(工匠)의 수가 충분치 못한 관계로, 목석(木石)을 다듬는 일을 기한 내에 마칠 길이 전혀 없습니다. 승도(僧徒) 중에 장수(匠手)를 업으로 하는 자들을 모집하여 장부로 작성해서 올려보내고 일을 끝마칠 때까지 부역시킬 일로 성화같이 팔도와 사도(四都)에 모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했고, 고종은 이를 허락하였다.

공사에 따르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1866년 11월부터 고액 화폐인 당백전(當百錢:일종의 국채)을 발행하였으나, 화폐 가치의 폭락과 물가의 폭등을 초래하였다. 결국 1867년 5월 15일 후에 당백전을 철파하였다.
1868년 7월 2일 경복궁이 완성되었다.

경복궁 중건 사업의 완성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는 화재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866년 3월 6일에는 동십자각에 있는 훈련도감 가건물의 화재로 건물 800여 칸이 불탔다. 입직 당상인 훈련대장 임태영(任泰瑛)을 파직하였다가 얼마 뒤에 용서하였다.

1867년 2월에는 영건도감이 감역소(監役所)에서 지핀 불씨로 인해 화재가 일어나 많은 자재들을 불태웠다.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공사 중단을 기대했지만 흥선대원군은 중건 사업을 더욱 독려하였다. 강력한 추진력 덕분인지, 중건 사업은 점점 그 완성을 보고 있었다.

1867년 11월 16일 고종은 경복궁 근정전에 앉아서 백관들의 축하를 받았다. 고종은 “옛날에 태조는 새로 큰 도읍을 세우고 경복궁이라는 대궐에서 거처하니, 앞에는 남산이고 뒤에는 삼각산(三角山)이라 바로 천지의 중간에 있는 좋은 곳이었고, 먼저 종묘를 짓고 뒤에 거처하는 방을 세우니 전각이 위아래로 취하는 바가 있었다. 상서로운 징조가 이미 나타나서 백 년 동안에 왕업이 흥성하였고, 그 제도는 실로 삼대(三代) 때를 본떴으니 후세에 더할 것이 없었다.”라 하여 경복궁의 의미를 기억하고 자신의 시대에 경복궁이 다시 완성된 사실에 크게 감격해 했다.

1868년 7월 2일 드디어 경복궁이 완성되었다. 고종은 대왕대비(신정왕후), 왕대비(헌종 비 명헌왕후), 대비(철인왕후, 철종비), 왕비(명성왕후)를 모두 대동하고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868년 7월 2일 경복궁이 완성되었다. 사진은 사신접대나 연회가 열렸던 경복궁 경회루
300년 동안 미처 하지 못하던 일을 했으니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고종은 “법궁(法宮)을 영건한 지 겨우 40달 가량 밖에 되지 않는데 지금 벌써 이어(移御)하게 되었다. 300년 동안 미처 하지 못하던 일을 이렇게 완공하였으니, 그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라며, 깊이 감격하였다. 

이어서, “국초에 영건한 공로가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 의성부원군(宜城府院君) 남은(南誾), 영의정 이직(李稷),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에게 있다는 것을 영원히 잊을 수 없으니, 이제 오랜 나라의 운수가 새로워지는 때를 당해서 성의를 보이는 조처가 없을 수 없다. 그들의 무덤에 다 같이 지방관들을 보내어 치제(致祭)를 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398년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피습되면서 역적의 굴레를 덮어썼던 정도전이 경복궁 중건으로 그 명예를 회복하는 순간이었다. 

중건된 경복궁의 규모는 330여 동의 궐내 전각 7,225칸, 후원 전각 232칸 반으로 7,450칸이 넘었다. 처음 정도전이 완성한 경복궁의 전각이 755칸과 비교하면 거의 10배나 되는 규모였다.
중건된 경복궁의 규모는 처음 완성한 경복궁의 10배나 되는 규모였다.
정도전 왕이 먼저 검소와 절약을 실천해야 함을 실천할 상징 공간으로 경복궁을 조성했다면, 1868년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경복궁 중건 사업은 최대한 왕실의 위상과 권위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7월 18일에는 창덕궁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어진(御眞)을 배봉(陪奉)하여 경복궁의 선원전에 옮기겼다. 조선후기 법궁 역할을 하던 창덕궁이 그 위상을 경복궁에 돌려준 것이었다. 1872년 9월 16일 영건도감 책임자들에 대한 시상이 이루어졌고, 영건도감에서 회계부(會計簿)를 바치면서 경복궁 중건 사업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당시의 재정 상황은 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내하(內下)한 돈이 11만 냥, 단목(丹木)이 5,000근, 백반(白礬)이 3,000근이며, 선파인(璿派人)이 원납(願納)한 돈이 34만 913냥 6전(錢)이고, 각인(各人)이 원납한 돈이 727만 7,780냥 4전 3푼에 백미(白米)가 824석, 총계 783만 8,694냥 3푼, 백미 824석, 단목 5,000근, 백반 3,000근이었다.
이하응초상(와룡관학창의본)
흥선대원군이 대왕대비인 신정왕후의 뜻을 받드는 형식으로 전개되었던 경복궁 중건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야망이 가장 굳건히 표현된 사업이었다. 국가 재정의 파탄,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의 불만 등 부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이때 완성된 경복궁 중건으로 인하여 현재의 우리는 가장 한국적인 궁궐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1911. 광화문 거리풍경, 월대의 모습이 확연히 잘 드러나 있다.
1866년 3월 3일 경복궁 영건일기에는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2023년 4월에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전차선로가 설치되며 땅속에 묻혔던 광화문 월대(月臺·궁궐 주요 건물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터보다 높게 쌓은 단)의 전모가 100년 만에 확인됐다. 

문화재청에서는 월대의 복원에 착수하는 등 1868년에 완성된 경복궁의 원래 모습 찾기를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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