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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태어난 곳은 창경궁 집복헌이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32) 사도세자 출생에서 죽음까지
1735년(영조 11) 1월 21일 조선 왕실에서는 큰 경사가 있었다. 후계자 문제로 크게 고민하던 영조가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아들을 낳은 것이다. 훗날 사도세자로 지칭되는 이 아들은 1736년 2세라는 최연소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될 정도로 귀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28세의 젊은 나이에 뒤주에 갇혀 사망하게 되면서 조선왕실 최대 비극의 주인공으로 기억되게 된다.
사도세자의 출생과 저승전 생활
1735년 1월 21일 『영조실록』은 영조와 영빈(暎嬪) 이씨와의 사이에서 원자가 태어났음을 알리고 있다. 원자가 태어난 곳은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이었다. “그때 나라에서 오랫동안 저사(儲嗣)가 없으니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시임 및 원임 대신 및 여러 재신과 옥당(玉堂)에서 모두 나아가 청대(請對)하니, 왕이 이들을 인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하례하는 말을 올리니, 왕이 말하기를, ‘삼종(三宗: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지금 다행히 돌아가서 열성조(列聖祖)에 배알(拜謁)할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다.’고 하였다.”는 실록의 기록에서 영조가 얼마나 원자의 탄생을 고대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1719년 영조는 정빈(靖嬪) 이씨와의 사이에서 효장세자를 낳았으나, 효장세자는 1728년 1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후 7년 동안 자식이 없던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출생은 그야말로 기쁨 그 자체였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즉시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공식 입적한 후 원자(元子)로 정했고, 이듬해에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대개 10세를 전후한 시기에 세자가 되는 전례에 비하면 매우 이례적인 조처였다.
사도세자는 태어난 지 100일도 되지 않아 창경궁의 저승전(儲承殿)에 머물게 된다. 저승전은 세자의 처소로 활용된 곳으로, 『궁궐지』에는 ‘건양문 밖에 있는 옛 구현전(求賢殿), 광연정(廣延亭)의 터에 위치했다.’고 적혀있다. 건양문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있는 문으로, 원래 창덕궁의 동쪽 문이었다가 창경궁이 생기면서 두 궁을 잇게 되었다. 또한 시민당(時敏堂)의 북쪽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면, 현재의 낙선재 동남쪽에 저승전이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한중록』에서는 “저승전 옆은 강연하는 곳인 낙선당과 소대(召對)하는 곳인 덕성합, 동궁이 축하를 받고 회강(會講)하는 시민당이 있고, 그 문밖에 춘방(春坊:세자의 공부를 마아보던 곳)과 계방(桂坊:세자의 호위를 맡아보던 곳)이 있었다. 이는 동궁께서 장성하시면 다 동궁에 딸린 까닭에 어른처럼 저승전의 주인이 되게 하신 왕의 뜻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승전은 원래 경종의 계비인 선의왕후 어씨가 거처하던 곳으로, 1730년에 선의왕후 승하 후 비어있었는데, 영조는 이곳에 세자가 거처하도록 한 것이었다. 혜경궁은 부모 곁에서 양육을 하게 했어야 하는데, 세자가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생활했던 것이 불행의 싹이 되었다고 보았다. 혜경궁은 저승전 거처가 세자를 망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한중록』에서 지적하고 있다. 아래의 기록을 보자.
1719년 영조는 정빈(靖嬪) 이씨와의 사이에서 효장세자를 낳았으나, 효장세자는 1728년 1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후 7년 동안 자식이 없던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출생은 그야말로 기쁨 그 자체였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즉시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공식 입적한 후 원자(元子)로 정했고, 이듬해에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대개 10세를 전후한 시기에 세자가 되는 전례에 비하면 매우 이례적인 조처였다.
사도세자는 태어난 지 100일도 되지 않아 창경궁의 저승전(儲承殿)에 머물게 된다. 저승전은 세자의 처소로 활용된 곳으로, 『궁궐지』에는 ‘건양문 밖에 있는 옛 구현전(求賢殿), 광연정(廣延亭)의 터에 위치했다.’고 적혀있다. 건양문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있는 문으로, 원래 창덕궁의 동쪽 문이었다가 창경궁이 생기면서 두 궁을 잇게 되었다. 또한 시민당(時敏堂)의 북쪽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면, 현재의 낙선재 동남쪽에 저승전이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한중록』에서는 “저승전 옆은 강연하는 곳인 낙선당과 소대(召對)하는 곳인 덕성합, 동궁이 축하를 받고 회강(會講)하는 시민당이 있고, 그 문밖에 춘방(春坊:세자의 공부를 마아보던 곳)과 계방(桂坊:세자의 호위를 맡아보던 곳)이 있었다. 이는 동궁께서 장성하시면 다 동궁에 딸린 까닭에 어른처럼 저승전의 주인이 되게 하신 왕의 뜻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승전은 원래 경종의 계비인 선의왕후 어씨가 거처하던 곳으로, 1730년에 선의왕후 승하 후 비어있었는데, 영조는 이곳에 세자가 거처하도록 한 것이었다. 혜경궁은 부모 곁에서 양육을 하게 했어야 하는데, 세자가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생활했던 것이 불행의 싹이 되었다고 보았다. 혜경궁은 저승전 거처가 세자를 망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한중록』에서 지적하고 있다. 아래의 기록을 보자.
영묘(영조)께서는 동궁의 자리가 오래 빈 것을 염려하시다가, 세자를 얻고 매우 기뻐하셨다. 영묘께서는 경모궁(景慕宮:사도세자)을 멀리 떠나보내는 일은 돌아보지 않고, 동궁의 주인이 빨리 생긴 것만을 기쁘게 여기셨다. 서둘러 예법만 차리려 하셨다. 경모궁은 태어난 지 백일 만에 탄생하신 집복헌을 떠나 보모에게 맡겨졌다. ... 저승전에서 아침 저녁으로 대하는 사람은 환관과 궁녀뿐이었고, 듣는 이야기도 별로 좋지 못했다. ... 저승전 저편에 취선당이 있는데, 이곳은 희빈(禧嬪:장희빈)이 갑술년 이후에 머물며 인현왕후를 저주하던 집이었다. 그런데 포대기에 쌓인 아기를 이런 황량한 곳에 혼자 두셨던 것이다. 또 희빈 처소를 소주방으로 만들어 경모궁께서 잡숫는 음식 처소로 삼았다.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어서 혜경궁은 “막 자라나는 아기네였다. 한때라도 그르치지 않고 잘못을 금지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되기 쉬울 때였다. 자연 보시지 않을 때가 많으니 어찌 탈이 나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사도세자의 저승전 생활이 부자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음을 거듭 언급하고 있다. 저승전은 1756년 화재로 인해 그 일대의 전각이 소실되었고, 현재는 빈터에 관천대(보물 85호)가 자리하고 있다.
창경궁 문정전 앞마당에서 사도세자가 생을 마감했다.
1762년 비극의 공간이 된 창경궁 문정전
어린 시절부터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세자에게 영조는 불같은 분노로 대처했다. 영조가 묻는 말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던 세자는 영조가 스트레스를 푸는 욕받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중록』에는, “밖에서 정사를 보시고 돌아오실 때 입으신 의대(衣襨) 차림으로 오셔서 동궁에게 ‘밥을 먹었느냐’고 물었다. 경모궁이 대답을 하면 즉시 그 귀를 씻으셨다. 또 씻으신 물을 화협옹주가 있는 집 창문으로 버리셨는데, 경모궁은 화협옹주를 대하면 우리 남매는 씻는 대상이라며 웃었다고 한다.”고 기록하였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1749년 영조가 대리청정을 지시하면서 더욱 커졌다. 이 시기 세자는 영조에게 용서를 비는 것으로 하루를 마칠 정도로 스트레스가 쌓였다. 1752년 음력 섣달에는 홍역에 걸린 몸으로 희정당의 앞문 선화문 앞에 엎드려 강추위 속에서 석고대죄(席藁待罪)를 하였고, 시민당 앞뜰, 영조의 잠저인 창의궁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석고대죄하였다.
1756년 5월에는 영조가 갑자기 낙선당을 찾았고, 이곳에서 사도세자에게 술을 먹었는지를 물었다. 세자는 술을 먹지 않았지만, 영조의 엄한 질책에 술을 먹었다고 했고 술을 대령한 궁녀 이름까지 대면서 영조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특히 당시는 영조가 금주령을 국가 정책으로 강력히 추구하던 시기였기에 세자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졌다. 세자의 아들을 낳은 궁녀 빙애를 때려 죽이기도 했는데, 『한중록』에서는 이 모든 것이 세자의 광증(狂症)이 심해졌기 때문으로 보았다.
1761년 4월 사도세자는 영조에 알리지도 않고 평양 지역을 다녀왔다. 20일간 세자의 거처에 내관을 앉혀 놓고 다녀왔지만 처음에 영조는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1762년 5월 나경언이 고변서를 올려 사도세자의 비행을 알리는 과정에서 평양행이 발각되었고, 영조의 세자에 대한 불신은 극에 이르게 되었다.
1762년(영조 38) 윤 5월 12일 영조는 사도세자를 창경궁 문정전 앞으로 나오게 했다. 문정전은 원래 창경궁의 편전이었지만, 1757년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하면서 혼전(魂殿)으로 사용하면서 임시로 휘령전徽寜殿)으로 칭하고 있었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혼령이 자신에게 와서 사도세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점을 주지시키기 위해 문정전을 비극의 공간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문정전 앞마당에 선 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며 자결할 것을 명했다. 세자는 옷소매를 찢어 목을 묶는 동작을 취했지만 시강원 관원을 비롯한 신하들이 제지했다.
영조는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께서 ‘정녕 나에게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서, 군사들로 하여금 전문(殿門)을 4, 5겹으로 굳게 막고 궁의 담 쪽을 향해 시위하여 칼을 뽑아 들게 했다. 이어서 세자에게 명해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자결을 명했다.
신하들의 만류로 자결이 여의치 않자, 영조는 외소주방에 있는 뒤주를 가져오게 했다. 『영조실록』에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운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1749년 영조가 대리청정을 지시하면서 더욱 커졌다. 이 시기 세자는 영조에게 용서를 비는 것으로 하루를 마칠 정도로 스트레스가 쌓였다. 1752년 음력 섣달에는 홍역에 걸린 몸으로 희정당의 앞문 선화문 앞에 엎드려 강추위 속에서 석고대죄(席藁待罪)를 하였고, 시민당 앞뜰, 영조의 잠저인 창의궁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석고대죄하였다.
1756년 5월에는 영조가 갑자기 낙선당을 찾았고, 이곳에서 사도세자에게 술을 먹었는지를 물었다. 세자는 술을 먹지 않았지만, 영조의 엄한 질책에 술을 먹었다고 했고 술을 대령한 궁녀 이름까지 대면서 영조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특히 당시는 영조가 금주령을 국가 정책으로 강력히 추구하던 시기였기에 세자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졌다. 세자의 아들을 낳은 궁녀 빙애를 때려 죽이기도 했는데, 『한중록』에서는 이 모든 것이 세자의 광증(狂症)이 심해졌기 때문으로 보았다.
1761년 4월 사도세자는 영조에 알리지도 않고 평양 지역을 다녀왔다. 20일간 세자의 거처에 내관을 앉혀 놓고 다녀왔지만 처음에 영조는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1762년 5월 나경언이 고변서를 올려 사도세자의 비행을 알리는 과정에서 평양행이 발각되었고, 영조의 세자에 대한 불신은 극에 이르게 되었다.
1762년(영조 38) 윤 5월 12일 영조는 사도세자를 창경궁 문정전 앞으로 나오게 했다. 문정전은 원래 창경궁의 편전이었지만, 1757년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하면서 혼전(魂殿)으로 사용하면서 임시로 휘령전徽寜殿)으로 칭하고 있었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혼령이 자신에게 와서 사도세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점을 주지시키기 위해 문정전을 비극의 공간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문정전 앞마당에 선 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며 자결할 것을 명했다. 세자는 옷소매를 찢어 목을 묶는 동작을 취했지만 시강원 관원을 비롯한 신하들이 제지했다.
영조는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께서 ‘정녕 나에게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서, 군사들로 하여금 전문(殿門)을 4, 5겹으로 굳게 막고 궁의 담 쪽을 향해 시위하여 칼을 뽑아 들게 했다. 이어서 세자에게 명해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자결을 명했다.
신하들의 만류로 자결이 여의치 않자, 영조는 외소주방에 있는 뒤주를 가져오게 했다. 『영조실록』에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운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화성 융릉 전경
배봉산 자락에 조성되었던 초라한 무덤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있어서 죄인의 신분으로 사망하였기에 무덤도 제대로 조성이 되지 못하였다. 영조는 양주 배봉산 자락(현재의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에 세자의 무덤을 조성하게 하고 묘호(墓號)를 수은(垂恩)이라고 했다. 세자의 예에 따르지도 않고 잡초가 무성히 많았던 초라한 무덤이었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에 만드는 것에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영조가 강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1762년 7월 23일 사도세자의 장례일에 영조는 직접 무덤을 찾아 하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1764년 5월 영조는 사도세자의 사당을 세우고 이를 수은묘(垂恩廟)라 하였다. 무덤과 사당의 명칭을 같게 한 것이다. “사도세자의 재기(再朞)가 이미 끝났으므로, 홍화문 동쪽에 묘우(廟宇)를 세우라고 명하고, 묘호를 수은(垂恩)이라고 내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수은묘는 정조 때 경모궁(景慕宮)이라 하였고, 경모궁은 현재 서울대학교 병원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사도세자 묘는 정조 즉위 후 세자의 무덤 격에 맞는 영우원(永祐園)이 되었고, 정조는 즉위 직후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였으며, 1789년(정조 13)에는 영우원을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원호를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었다.
1899년(광무 3)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숭하면서 현륭원 역시 융릉(隆陵)으로 높여졌다. 1968년 배봉산의 옛 사도세자 무덤 자리에서 처음 이곳에 사도세자를 매장할 때 함께 묻은 세자의 청화백자 묘지석(墓誌石)이 발굴되었는데,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을 옮길 때 같이 가져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둔 것으로 보고 있다. 사도세자의 무덤 하면 처음부터 수원(현재는 화성시 안녕동)에 조성된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원래는 현재의 서울시에 위치해 있었던 점도 알아둘 만하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에 만드는 것에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영조가 강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1762년 7월 23일 사도세자의 장례일에 영조는 직접 무덤을 찾아 하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1764년 5월 영조는 사도세자의 사당을 세우고 이를 수은묘(垂恩廟)라 하였다. 무덤과 사당의 명칭을 같게 한 것이다. “사도세자의 재기(再朞)가 이미 끝났으므로, 홍화문 동쪽에 묘우(廟宇)를 세우라고 명하고, 묘호를 수은(垂恩)이라고 내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수은묘는 정조 때 경모궁(景慕宮)이라 하였고, 경모궁은 현재 서울대학교 병원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사도세자 묘는 정조 즉위 후 세자의 무덤 격에 맞는 영우원(永祐園)이 되었고, 정조는 즉위 직후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였으며, 1789년(정조 13)에는 영우원을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원호를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었다.
1899년(광무 3)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숭하면서 현륭원 역시 융릉(隆陵)으로 높여졌다. 1968년 배봉산의 옛 사도세자 무덤 자리에서 처음 이곳에 사도세자를 매장할 때 함께 묻은 세자의 청화백자 묘지석(墓誌石)이 발굴되었는데,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을 옮길 때 같이 가져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둔 것으로 보고 있다. 사도세자의 무덤 하면 처음부터 수원(현재는 화성시 안녕동)에 조성된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원래는 현재의 서울시에 위치해 있었던 점도 알아둘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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