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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1) 국내 반도체 산업의 시작
마포구에 위치한 옛 당인리발전소의 흔적. 지금은 '마포새빛문화숲'이 조성되어 있다.
TV, 라디오, 유튜브 등 여러 미디어를 넘나들며 과학부터 전설에 이르는 해박한 지식을 뽐내고 있는 분이죠. 숭실사이버대학교 환경안전공학과 곽재식 교수가 <내 손안에 서울> 전문칼럼의 새로운 필진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라는 주제 아래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전할 예정인데요. 오늘은 우리나라 주요 산업으로 성장한 ‘반도체’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칼럼을 통해 과학과 더 친해지고 서울을 재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전화기도 없던 시절,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릴레이’가 있었으니…
19세기 후반, 아직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발명왕이 되지 못해 전신 기술자로 일하던 시절, 미국에서는 ‘전신’이라는 기술을 이용해 통신을 하고 있었다. 전화기도 개발되지 못했던 시대라, 그저 전선에 전기가 통하고 있느냐 마느냐라는 것을 신호로 아주 단순한 통신을 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이때의 기술로는 전기를 멀리까지 잘 보낼 수가 없었다. 뉴욕에서 LA까지, 넓고 넓은 땅덩어리를 가진 미국에서 전기를 보내다 보면 나중에는 전기가 흐르는 것인지 아닌지 잘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전기가 약해진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우선 뉴욕에서 달라스까지만 전선을 연결한다. 그리고 달라스에서 LA까지 연결해 놓은 장비를 별도로 한 대 더 마련한다. 그리고 달라스에 사람을 한 명 앉혀 두고 뉴욕에서 전기가 오면, 그 때만 달라스에서 LA까지 연결된 다른 장비를 이용해서 전기를 보낸다. 이렇게 하면, 가운데에 있는 달라스를 중계소 삼아서 뉴욕의 신호를 LA로 전해줄 수 있다.
곧 미국의 과학자들은 이런 작업을 사람 없이 자동으로 해 주는 장치도 만들었다. 그래서 이 장치를 ‘릴레이’라고 불렀다. 초창기 릴레이는 톱니바퀴와 스위치 부품이 찰칵거리며 움직이는 기계였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우선 뉴욕에서 달라스까지만 전선을 연결한다. 그리고 달라스에서 LA까지 연결해 놓은 장비를 별도로 한 대 더 마련한다. 그리고 달라스에 사람을 한 명 앉혀 두고 뉴욕에서 전기가 오면, 그 때만 달라스에서 LA까지 연결된 다른 장비를 이용해서 전기를 보낸다. 이렇게 하면, 가운데에 있는 달라스를 중계소 삼아서 뉴욕의 신호를 LA로 전해줄 수 있다.
곧 미국의 과학자들은 이런 작업을 사람 없이 자동으로 해 주는 장치도 만들었다. 그래서 이 장치를 ‘릴레이’라고 불렀다. 초창기 릴레이는 톱니바퀴와 스위치 부품이 찰칵거리며 움직이는 기계였다.
1940년대가 되자 과학자들은
전기가 통하는 듯 마는 듯한 애매한 금속에다가
불순물을 조금 섞으면
조건에 따라 전기가 통하기도 하고 안 통하기도 한다는 점을 알아냈다.
전기가 통하는 듯 마는 듯한 애매한 금속에다가
불순물을 조금 섞으면
조건에 따라 전기가 통하기도 하고 안 통하기도 한다는 점을 알아냈다.
이후 세월이 흘러 1940년대가 되자 과학자들은 전기가 통하는 듯 마는 듯한 애매한 금속에다가 불순물을 조금 섞으면 조건에 따라 전기가 통하기도 하고 안 통하기도 한다는 점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이용하면 아주 작은 크기의 부품으로 훨씬 튼튼하고 오래 가며 정확하게 작동하는 릴레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트랜지스터’다. 그리고 트랜지스터의 탄생을 보통 반도체 산업의 시작으로 본다.
릴레이는 조건에 따라 전기를 보내기도 하고 보내지 않기도 하는 장치다. 그러므로, 마치 조건에 따라 무엇인가 판단을 하는 것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수학자들은 이런 단순한 판단을 하는 장치를 여러 개 만들어서 수십 개, 수백 개를 복잡하게 조합해 놓으면 마치 계산을 하고 생각을 하는 듯한 어려운 판단도 흉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즉, 릴레이를 아주 많이 연결하면 컴퓨터처럼 사용할 수 있다.
작고 튼튼한 트랜지스터를 많이 연결해서 그런 기계를 만든다면 작은 크기의 실용적인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바로 그런 이유 덕택에 반도체를 이용해서 온갖 현대의 첨단 전자기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릴레이는 조건에 따라 전기를 보내기도 하고 보내지 않기도 하는 장치다. 그러므로, 마치 조건에 따라 무엇인가 판단을 하는 것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수학자들은 이런 단순한 판단을 하는 장치를 여러 개 만들어서 수십 개, 수백 개를 복잡하게 조합해 놓으면 마치 계산을 하고 생각을 하는 듯한 어려운 판단도 흉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즉, 릴레이를 아주 많이 연결하면 컴퓨터처럼 사용할 수 있다.
작고 튼튼한 트랜지스터를 많이 연결해서 그런 기계를 만든다면 작은 크기의 실용적인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바로 그런 이유 덕택에 반도체를 이용해서 온갖 현대의 첨단 전자기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경제 성장 주역이 된 ‘반도체’…시작은 작은 조립공장
반도체를 세상의 온갖 곳에 활용하고 있는 21세기가 되자, 한국 경제에서 반도체 산업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굉장히 커졌다. 한국이 누리고 있는 지금의 풍요가 어떻게 가능한 지 한 단어로 설명해 보라고 하면 “반도체” 라고 답할 수 있다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 누구 덕택에 한국에서는 반도체 산업이 시작된 것일까? 반도체는 최고의 첨단 기술이 필요한 값비싼 물건이다. 어떻게 이런 제품을 한국에서 만들 생각을 했던 것일까?
현대의 반도체는 대부분 ‘규소’를 주 재료로 한 뒤, ‘붕소, 인’ 등의 물질을 불순물로 사용해서 핵심 부분을 만든다. 반도체의 핵심인 규소로 된 부분을 보면 금속으로 만든 물체처럼 보인다. 그런데 막상 우리에게 친숙한 제품으로 팔리는 반도체를 보면 그런 모습은 아니다. 즉, 반도체는 그 핵심이 되는 규소 부분에 플라스틱으로 된 껍데기를 씌우고 은색 금속으로 된 다리를 연결한 것이 ‘최종 제품’이다.
반도체 산업이 급성장하던 1960년대, 미국의 MIT 유학생으로 가 있던 한국인 과학자 이석우는 미국의 한 중소 반도체 회사에 취직해서 일하다가, 잘하면 그 시절의 한국도 반도체 산업에 발을 들이밀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물론 반도체의 핵심인 규소로 된 부분을 정밀하게 만들어 내는 작업은 당시 한국에서 할 수는 없었지만, 그 핵심 부분에 껍데기를 붙이고 다리를 다는 작업이라면 충분히 한국에서 할 수 있어 보였다. 그는 한국에 가면 그런 정교한 작업을 열심히 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 많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값싸게 빨리 반도체를 최종 제품으로 완성해서 일본 등지의 근처 전자산업이 발전한 곳으로 팔면 장사가 될 거라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 누구 덕택에 한국에서는 반도체 산업이 시작된 것일까? 반도체는 최고의 첨단 기술이 필요한 값비싼 물건이다. 어떻게 이런 제품을 한국에서 만들 생각을 했던 것일까?
현대의 반도체는 대부분 ‘규소’를 주 재료로 한 뒤, ‘붕소, 인’ 등의 물질을 불순물로 사용해서 핵심 부분을 만든다. 반도체의 핵심인 규소로 된 부분을 보면 금속으로 만든 물체처럼 보인다. 그런데 막상 우리에게 친숙한 제품으로 팔리는 반도체를 보면 그런 모습은 아니다. 즉, 반도체는 그 핵심이 되는 규소 부분에 플라스틱으로 된 껍데기를 씌우고 은색 금속으로 된 다리를 연결한 것이 ‘최종 제품’이다.
반도체 산업이 급성장하던 1960년대, 미국의 MIT 유학생으로 가 있던 한국인 과학자 이석우는 미국의 한 중소 반도체 회사에 취직해서 일하다가, 잘하면 그 시절의 한국도 반도체 산업에 발을 들이밀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물론 반도체의 핵심인 규소로 된 부분을 정밀하게 만들어 내는 작업은 당시 한국에서 할 수는 없었지만, 그 핵심 부분에 껍데기를 붙이고 다리를 다는 작업이라면 충분히 한국에서 할 수 있어 보였다. 그는 한국에 가면 그런 정교한 작업을 열심히 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 많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값싸게 빨리 반도체를 최종 제품으로 완성해서 일본 등지의 근처 전자산업이 발전한 곳으로 팔면 장사가 될 거라는 계획이었다.
[참고자료] 1960년대 라디오 공장 (출처: e-영상역사관)
그의 발상은 미국 사람들에게도 꽤 설득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런 공장을 차려 보자는 생각이 얼마 후 현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등 많은 곳의 자료에서 이 작업을 시작한 1960년대의 작은 공장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다.
이 최초의 반도체 산업을 도맡았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반도체 공장은 당시 당인리 발전소라고 부르던 지금의 서울 화력 발전소 근처에 군용 천막 두 개를 치고, 그 안에서 부지런히 손을 꼼지락거리며 비닐 위에 깔린 트랜지스터를 조립하던 한 무리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세계 유수의 대기업들과 거래하며 수십조를 투자하고 수백조를 벌어들이는 사업이 되어 각계각층의 명사들이 관심을 갖는 너무도 멋진 분야가 반도체 산업이지만, 그 시작은 바로 1960년대 그 여공들의 손끝이었던 셈이다.
이 최초의 반도체 산업을 도맡았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반도체 공장은 당시 당인리 발전소라고 부르던 지금의 서울 화력 발전소 근처에 군용 천막 두 개를 치고, 그 안에서 부지런히 손을 꼼지락거리며 비닐 위에 깔린 트랜지스터를 조립하던 한 무리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세계 유수의 대기업들과 거래하며 수십조를 투자하고 수백조를 벌어들이는 사업이 되어 각계각층의 명사들이 관심을 갖는 너무도 멋진 분야가 반도체 산업이지만, 그 시작은 바로 1960년대 그 여공들의 손끝이었던 셈이다.
이후 이렇게 미국에서 주요 부품을 만들고 한국에서 간단한 조립을 해서 완성을 하는 방식의 반도체 공장들이 한국에 여럿 생겨났다. 이런 공장들은 반도체의 핵심 기술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 경제가 반도체 산업에 연결되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반도체 산업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고 반도체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1960년대의 한국은 지방 농어촌 지역에는 전기와 수도가 제대로 보급되지 못한 곳도 적지 않았던 낙후된 나라였다. 그런 곳에서 첨단 기술의 가장 꼭대기에 서 있는 산업과 연결을 지어 가며 미래의 발전을 기대해 본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한국 반도체 산업 초창기의 도전 덕택 아니었나 싶다.
1960년대의 한국은 지방 농어촌 지역에는 전기와 수도가 제대로 보급되지 못한 곳도 적지 않았던 낙후된 나라였다. 그런 곳에서 첨단 기술의 가장 꼭대기에 서 있는 산업과 연결을 지어 가며 미래의 발전을 기대해 본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한국 반도체 산업 초창기의 도전 덕택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번화가로 변한 합정역 근처 어딘가에 최초의 반도체 공장이 있지 않았을까.
태블릿PC, 클럽 조명의 깜빡임…‘화려한 디지털 기술’의 뿌리가 숨어있는 곳
아쉽게도 한국 반도체 산업이 대단히 크게 성장한 지금, 그 최초의 반도체 공장이 정확히 어느 위치인지 명확한 기록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만큼 우리 스스로의 과거에 대해서 밝혀 둔 사실이 부족하다는 점은 무척 안타깝다. 당시 일하던 직원 중에는 아직 살아 계신 분들도 많으실 텐데, 그 분들의 기억을 지금이라도 좀 더 조사하여 남겨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종종 해 본다.
한국 최초의 반도체 회사가 있던 자리가 당인리 발전소 근처였다고 하니, 아마도 지금의 합정역에서 홍대입구역 근처의 어느 지점이 아닐까 나는 추측해 본다. 대체로 지금은 번화가로 변한 지역이다. 나는 가끔 이곳의 화려한 거리를 걸을 때 반도체 산업의 시작에 대해 잠시 생각에 빠져 봐도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본다. 맛집에서 주문할 때 쓰는 태블릿PC에서부터, 클럽의 조명을 조절하는 장치까지, 그 모든 화려한 디지털 기술의 뿌리가 지금은 대부분에게 잊힌 그곳 어느 골목 어귀에서 아주 소박하게 시작되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한국 최초의 반도체 회사가 있던 자리가 당인리 발전소 근처였다고 하니, 아마도 지금의 합정역에서 홍대입구역 근처의 어느 지점이 아닐까 나는 추측해 본다. 대체로 지금은 번화가로 변한 지역이다. 나는 가끔 이곳의 화려한 거리를 걸을 때 반도체 산업의 시작에 대해 잠시 생각에 빠져 봐도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본다. 맛집에서 주문할 때 쓰는 태블릿PC에서부터, 클럽의 조명을 조절하는 장치까지, 그 모든 화려한 디지털 기술의 뿌리가 지금은 대부분에게 잊힌 그곳 어느 골목 어귀에서 아주 소박하게 시작되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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