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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

홍릉수목원에는 '홍릉'이 없다! 명성황후가 잠든 곳은 어디?

by 준~ 2023.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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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수목원에는 '홍릉'이 없다! 명성황후가 잠든 곳은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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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으로 남양주에 위치해 있다.
1897년 10월 27일 고종은 
경운궁 남문인 인화문 밖으로 나아가 곡을 하고 
왕비의 상여를 홍릉으로 보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54) 고종의 국장 추진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의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고종에게 있어서 정치적으로 가장 부담으로 다가온 것은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의 국장(國葬) 추진이었다. 잔인하게 희생되어 왕비의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상황에서 왕비의 국장과 무덤의 조성은 국정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1895년 12월 1일(음력 10월 15일) 고종은 명성황후의 승하를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국장을 추진해 나갔다. 

고종이 주도한 국장 추진

고종은 “지난번 변란 때에 왕후의 소재를 알지 못하였으나 날이 점차 오래되니 그날에 세상을 떠난 증거가 정확하였다. 개국(開國) 504년 8월 20일 묘시(卯時)에 왕후가 곤녕합(坤寧閤)에서 승하하였음을 반포하라.”는 조령을 내리면서, 명성황후의 승하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땅이 편안하다’는 뜻의 곤녕합(坤寧閤)은 명성황후가 비극적인 생애를 마친 장소다.
김홍집(金弘集) 내각에서 일단 국장을 준비하였으나,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은 해체되었고, 고종이 주도하는 국장으로 성격의 변화가 왔다. 아관파천이 이루어진 2월 11일 고종은 을미사적(乙未四賊)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지목하고 이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총리대신 김홍집은 광화문 앞 경무청에서 처형되었다. 고종은 김홍집이 추진했던 국장 일정을 중지하고, 원점에서 다시 추진하였다.

김홍집 내각이 처음 명성황후의 무덤으로 정한 곳은 현종과 명성황후의 쌍릉이 조성된 숭릉(崇陵) 오른쪽 언덕으로, 현재의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역이었다. 고종은 장지(葬地)도 재검토할 것을 지시하였고, 그렇게 하여 최종적으로 확정된 곳이 청량리 인근이었다. 1897년 1월 3일 장지가 결정되자 이제 왕비에 대한 시호, 능호, 전호를 정하였는데, 시호는 문성(文成), 능호는 홍릉(洪陵), 전호는 경효(景孝)로 정하였다.

홍릉의 조성 공사는 1897년 5월 6일의 장례식을 목표로 진행되었지만, 산릉 주변에서 유해가 발견되는 등 여러 변수가 발생하면서 한 달을 연기하여 6월 6일 하관식을 갖는 것으로 조정하였다. 그러나 왕비의 국장은 또다시 연기되었다. 국장을 앞둔 1897년 5월부터 고종의 황제 즉위를 요청하는 상소문이 연이어 올라왔기 때문이다.

결국 국장은 고종의 황제 즉위식 이후로 추진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10월 15일 확정된 국장 일정은 10월 27일 발인, 10월 28일 하관이었다. 『고종실록』에는 “구덩이의 깊이는 4척 5촌으로 하며 외재궁(外梓宮)을 배진(陪進)하는 것은 같은 달 23일 인시(寅時:새벽 4시)에 하고, 외재궁을 내리는 것은 같은 날 미시(未時)에 한다. 찬궁(欑宮)을 여는 것은 같은 달 25일 미시에 하되 먼저 서쪽부터 열며, 발인은 같은 달 27일 인시에 한다. 빈소를 만드는 것은 때를 따라 하며, 능소(陵所)에서 찬궁을 여는 것은 같은 날 신시(申時)에 하되 먼저 서쪽부터 연다. 출발은 때를 따라 하며, 현궁(玄宮)에 하관하는 것은 같은 달 28일 진시(辰時)에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897년 10월 27일 고종은 경운궁 남문인 인화문(仁化門) 밖으로 나아가 곡을 하고 왕비의 상여를 홍릉으로 보냈다. 중화전의 남쪽에 위치한 인화문은 경운궁의 정문으로, 1897년 고종이 환궁할 때도 인화문을 거쳐 들어갔다. 대한제국 출범 후 환구단이 건설되고 궁궐의 동쪽이 새로운 중심이 되어 동문인 대한문(大韓門:원래 이름 대안문)이 정문의 기능을 하게 되면서 인화문은 철거되었다.
홍릉수목원에는 고종의 왕비였던 명성황후와 최초 조성된 옛 홍릉에 대한 안내가 남아있다.
고종은 이날 오후 2시 홍릉에 도착하였고, 외국의 공사들도 홍릉에 마련된 접견소에서 맥주와 포도주 등의 대접을 받으며 고종과 함께 밤을 지샜다. 당시 명성황후의 국장 모습은 의궤(儀軌)의 기록으로 남겼다. 

국장 관련 의궤의 제작

명성황후의 국장은 세 개의 도감이 나누어 업무를 분장했다. 국장을 주관한 국장도감(國葬都監), 홍릉 조성을 담당한 산릉도감(山陵都監), 빈전과 혼전의 조성을 담당한 빈전혼전도감(殯殿魂殿都監)이 그것이다.

이들 도감에서는 국장이 완료된 후 각각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명성황후 홍릉(洪陵)산릉도감의궤』, 『명성황후 빈전혼전도감의궤』를 편찬하였다.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는 역대로 제작된 국장도감의궤 중에서 분량이 가장 많은데, 「발인반차도(發引班次圖)」는 78면에 걸쳐 그려져 있다. 의례를 왕비의 지위가 아닌 황후의 지위로 치렀기 때문이다. 반차도의 중심이 되는 것은 재궁을 실은 대여(大轝)의 등장이다. 대여를 멘 160여 명의 사람들의 모습과 함께 대여 주변에는 궁내부 순검, 시위대 병정 등이 좌우에서 호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명성황후 홍릉산릉도감의궤』는 청량리에 홍릉을 조성한 과정을 정리한 의궤로, 임시 건물과 기계류를 만드는 삼물소(三物所), 침전(寢殿), 재실(齋室) 등의 건축을 맡은 조성소(造成所), 잔디를 입히는 보토소(補土所), 외국 외교관의 접견을 맡은 접견소(接見所) 등의 업무 분장을 기록하고 있다. 왕이나 왕비의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 대신에 황제나 황후의 제사를 지내는 침전(寢殿)을 조성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명성황후 빈전혼전도감의궤』는 황후의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의 조성과 업무 분장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 국장 관련 의궤는 규장각, 시강원, 비서감, 예식원, 의정부, 정족산, 오대산 등 7곳에 보관하였음이 나타나는데, 시강원, 비서감, 장례원 등은 대한제국 시기 이후 새롭게 보관처가 된 곳이다. 황제용으로 올린 의궤는 노란색 비단 표지로, 황태자에게 올리는 의궤는 붉은색 비단 표지로 제작하였는데, 기존이 의궤의 표지가 초록색 비단인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황제를 상징하는 색이 노란색인 만큼 의궤의 표지에도 명실상부한 황제국임을 알린 것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 청량리 일대에 조성이 되었으나, 1900년부터 이 지역이 무덤 터로 부적절하다는 논의가 있게 되면서 현재의 남양주 금곡(金谷)에 새로운 산릉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정치적인 상황이 여의치 않아 공사는 중단되었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남양주 금곡에 황제릉이 조성되었고, 홍릉에 있던 명성황후의 무덤도 이곳으로 옮겨져 합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청량리에 있던 홍릉의 기억은 ‘홍릉 갈비’, ‘홍릉 수목원’의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홍릉수목원은 홍릉 지역에 임업시험장을 설치하면서 조성되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모태인 한국과학원(KAIS)은 1971년 청량리에 있던 홍릉 경역 안에 처음 설립되었다.
앞면에 있는 ‘장충단(奬忠檀)’이라는 비의 명칭은 순종이 썼다.

을미사변 순국자를 위한 제단, 장충단

을미사변과 관련된 공간이 서울 도심에 위치해 있는데 장충단(奬忠壇)이 바로 그곳이다. 장충단의 시작은 1900년 9월 고종이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 열사들을 제사하기 위해 세운 사당에서 출발한다.

조선후기 오군영의 하나인 어영청(御營廳)의 분영(分營)으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남소영(南小營)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 장충단을 짓고 순국 열사들의 제사를 지내게 했던 것이다. 처음에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영관 염도희, 영관 이경호를 주신으로 하고, 김홍제, 이학승, 이종구 등 장병들을 배향했다가, 다음 해에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비롯하여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죽은 문신들도 포함하였다.
장충단비는 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水標橋) 서쪽으로 옮겼다.
일본의 압력으로 1908년 장충단의 제사는 중지되었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살해되자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장충단에서 열렸다. 장충단비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을 새긴 비로 1900년 11월에 세워졌다. 앞면에 새긴 ‘奬忠壇’이란 전서(篆書)는 황태자 순종의 예필(睿筆)이며, 뒷면의 비문은 고종의 칙령으로 육군부장 민영환이 찬(撰)한 것이다. 1910년 이후 일제가 뽑아버렸던 비신(碑身)을 광복 이후 찾아서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에 다시 세웠고, 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水標橋) 서쪽으로 옮겼다.
일제강점기에 발행한 박문사 사진엽서, 박문사는 1932년 장충단 동쪽에 지은 사찰이었다.
1920년 이후 일제는 장충단 일대에 일본식 공원을 조성하고 벚나무를 심었다.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절인 박문사(博文寺)를 장충단 공원 동쪽(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에 세웠다. 사찰이 자리를 잡은 언덕은 춘무산(春畝山)이라 하였는데, 박문사는 이토의 이름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고, 춘무는 이토의 호이다. 일제는 박문사 건축에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 등을 활용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을 떼어 박문사의 정문으로 만들었다. 한동안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던 흥화문은 1988년 경희궁으로 돌아와 원래의 위치를 되찾게 되었다.

장충단 공원은 1967년 가수 배호가 부른 ‘안개 낀 장충단 공원’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서울의 명소가 노래 제목으로 등장한 사례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 ‘돌아가는 삼각지’, 비 내리는 영동교’, ‘신사동 그 사람’,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혜화동’, ‘강남 스타일’ 등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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