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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

최초의 점등식, 명성왕후 시해…경복궁 구중궁궐 이야기

by 준~ 2023.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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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점등식, 명성왕후 시해…경복궁 구중궁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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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건청궁을 왕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48) 경복궁의 뒤뜰

경복궁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 있다. 건청궁(乾淸宮)과 집옥재(集玉齋)는 경복궁 후원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에 가기 쉽지 않다. 고종이 독립된 공간으로 설치한 건청궁과 근대의 길로 갈 것을 모색한 집옥재, 그리고 건청궁과 연결되는 정자 향원정(香遠亭)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궁궐 속의 궁궐, 건청궁

1865년 조대비의 하교로부터 시작한 경복궁 중건 사업은 1868년 7월 일단 그 완성을 보았다. 고종은 대왕대비 신정왕후, 왕비 명성왕후 등과 함께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경복궁 시대의 시작을 다시 알렸다.

경복궁 중건 사업의 실질적 지휘자였던 흥선대원군이 1873년 하야하면서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고종이 새로운 건물 하나를 완성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궁궐 속의 궁궐 건청궁이다. 건청궁의 공사는 궁궐의 내탕금으로 비밀리에 진행되었는데, 건립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를 반대하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건청궁 건립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를 반대하는 상소문이 올라오기도 했다.
부호군(副護軍) 강진규(姜晉奎)는 “삼가 듣건대, 건청궁을 짓는 역사(役事)가 몹시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합니다. 이곳은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데, 그토록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서 어디다 쓴다고 지나치게 경비를 허비하는 것입니까? 게다가 창고가 화재를 입어 한창 수선하고 있는 데 다시 이렇게 정도에 지나친 큰 공사를 한다면 백성들은 거듭 시달림을 받게 되고 나라의 저축은 더욱 모자라게 될 것이니 밝고 검박한 성상의 덕에 손상을 주는 것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면서, 건청궁 공사 중지를 건의하였다.

고종은 가납(嘉納:아름답게 받아들임)한다고 하였지만, 역대 왕의 초상화를 봉안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미 어진을 봉안하는 장소가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건청궁 건립은 고종 스스로가 새로운 모색을 할 공간의 필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1875년 10월에는 수정전(修政殿)에 모신 어진과 교명, 책보를 건청궁 관문당(觀文堂)에 옮겨 봉안할 것을 지시하면서 건청궁의 위상을 높였다.
건청궁의 사랑채인 장안당(長安堂)은 고종이 주로 사용했다.
건청궁은 고종이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국정을 주도한 직후에 세운 건물이라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건청궁은 궁궐 건축이 갖는 격식보다는 사랑채, 안채, 행랑채를 갖춘 사대부 집과 비슷하게 조성되었다. 사랑채인 장안당(長安堂)에는 고종이, 안채인 곤녕합(坤寧閤)에는 명성왕후가 거처했다. 복수당(福綏堂)에는 상궁들의 거처와 곳간 등이 있었다.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 형태는 순조 때 효명세자가 부친을 위해 지은 연경당(演慶堂)이나, 헌종 때 지은 낙선재(樂善齋)와 유사하다. 건청궁은 용도를 떠나, 고종이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국정을 주도한 직후에 세운 건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고종은 건청궁에서 원임 대신과 시임 대신들을 접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 대리공사 다카히라 쇼고로(高平小五郞)를 접견하는 등 왕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근대 문물 수용의 중심 공간

경복궁의 내전 일부가 불에 타 고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건청궁은 잠시 그 위상을 잃었으나, 1885년(고종 22) 고종이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오면서 근대사의 중심 무대로 자리를 잡게 된다.

1885년 9월에는 미국 대리공사 폴크(福久: Foulk, George C.), 1886년 5월에는 프랑스 사신 코고르당(戈可當 : Cogordan)을 접견한 사실도 실록에 보인다. 1891년 11월에도 일본 공사와 미국 공사를 접견하였다. 고종의 외국 공사 접견은 건청궁에서 수시로 이루어졌고, 이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는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1894년 2월 27일 『고종실록』의 “건청궁에 나아가 각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이어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는 기록이 대표적이다. 고종은 이곳에서 근대 문물 수용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1887년 3월 6일 우리나라 최초로 전기를 들여온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전기 발상지’ 표지석
1879년에 설립된 에디슨 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하면서 처음 전등이 들어왔는데, 8년 후 경복궁 건청궁 인근에서 최초의 점등식이 있었다. 이는 중국의 자금성에서 전기를 받아들인 것보다 시기가 앞선다.

문화재청에서는 2015년 경복궁 영훈당 권역 발굴조사 결과 1887년 국내 최초 전기를 생산해 전등을 밝힌 전기등소(電氣燈所)의 위치가 향원지 남쪽과 영훈당의 북쪽 사이인 것으로 밝혔다. 이곳에서 원료인 석탄을 보관하던 탄고와 발전소 터 등 1887년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졌던 전기등소의 유구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1888년에는 건청궁 내에 1층 한옥으로 조성한 관문당(觀文堂)을 보수하여, 서양식 2층 건물인 관문각(觀文閣)으로 만들었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관문각은 명성왕후가 외국 손님을 접견하는 곳으로도 이용되었으며, 사바틴이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제가 자행한 을미사변의 현장을 목격한 장소가 되기도 했다.
명성왕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던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명성왕후는 건청궁에 거처하는 동안 일본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러시아 등 서양 여러 나라와 활발한 외교정책을 폈다. 이에 일제는 조선 침략의 가장 걸림돌이 되는 왕비 제거에 나섰고, 1895년 8월 20일 명성왕후는 건청궁 곤녕합에서 잔인하게 피살되었다.
개국 504년 8월 20일 묘시에 
왕후가 곤녕합에서 승하하셨다.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에는 “개국 504년 8월 20일 묘시에 왕후가 곤녕합에서 승하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명성왕후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충격을 직접 겪은 고종은 1896년 2월 러시아와 친러파의 도움을 받아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후 경복궁은 왕이 다시는 거처하지 않은 공간이 되었고, 그 지위도 현격히 추락하였다.  

향기는 멀어질수록 좋다는 향원정

건청궁 남쪽에는 향원지라는 연못의 인공 섬 위에 만든 정자 ‘향원정(香遠亭)’이 있다. ‘향원정’이라는 이름은 북송 시대의 성리학자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 중에서 연꽃을 예찬하면서 쓴 ‘연꽃의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香遠益淸)’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경회루가 사신을 접대하거나 국가적 행사를 하는 누각이었다면, 향원정은 왕족의 사적인 휴식 공간이었다. 향원정의 모태는 취로정(翠露亭)으로, 『세조실록』에 “경복궁의 후원에 신정(新亭)을 낙성(落成)하였다. ... 이름은 ‘취로정’이라 하고 앞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복원공사 전의 취향교와 향원정.
향원정에 이르는 취향교. 건청궁이 있는 북쪽의 목재를 사용해 흰색의 아치형태로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취로정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건청궁을 지을 무렵 이곳에 정자를 다시 조성하면서 ‘향원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종과 명성왕후가 건청궁에 거처하였기에, 연못을 건너 향원정에 갈 수 있도록 ‘취향교(醉香橋)’를 만들었다. ‘향기에 취한 다리’라는 뜻을 가진 취향교는 향원정 북쪽에 무지개 모양으로 설치하였다. 취향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는데, 1953년 복원할 때는 남쪽에서 향원정으로 갈 수 있게 다리를 설치하였다.

당시 건청궁이 복원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복궁에서 향원정으로 가려면 다리가 남쪽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53년의 취향교 복원은 잘못된 문화재 복원의 대표적인 사례였고, 2017년 문화재청은 향원정 보수공사를 하면서 취향교를 원래의 위치대로 복원할 것을 결정하였다. 향원정의 북쪽에 남아 있는 다리의 유구를 활용하였고, 2021년 복원이 완료되었다.
집옥재(集玉齋)는 고종의 서재로 알려져 있다. 집옥재는 '귀한 옥을 모은다'는 뜻이다.

옥 같은 책을 모은 집옥재

건청궁의 서북쪽에는 청나라 양식의 요소가 많아 이국적인 모습을 한 건물이 눈이 들어온다. 중심에 자리를 잡은 집옥재(集玉齋)와 그 서쪽에 팔우정(八隅亭), 동쪽에 협길당(協吉堂)이 있는데, 세 채의 건물은 유리창이 있는 복도로 연결되어 하나의 건물을 이루고 있다.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은 1881년(고종 18)에 창덕궁 함녕전(창덕궁 수정전 자리에 설치한 전각)의 북별당(北別堂)이었는데,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긴 후인 1891년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

1891년 7월 13일 고종은 집옥재를 옮겨 짓는 공사를 중건소(重建所)로 하여금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고종은 집옥재에 어진을 봉안하고, 서재로 사용하였는데, 집옥재에는 4만여 권의 도서가 수집되었다. 현판은 세로로 쓰여 있는데, 중국 북송의 서예가 미불(米芾)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집옥재의 도서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고종은 집옥재를 건청궁과 같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활용하였다. 외국과의 문물 교류에 대한 공간으로 삼으려는 의지가 컸기 때문이다. 1893년(고종 30) 한 해에만 영국, 일본,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외국 공사들을 접견한 기록이 『고종실록』에 나타난다. 고종은 집옥재를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중심 공간으로 삼고, 왕이 주도하는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집옥재는 고종의 서재였던 만큼 이를 현대식으로 활용하는 방안들도 진행 중이다. 2016년 집옥재를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고, 궁궐을 찾는 사람들에게 개방을 하였다. 코로나 유행 기간에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집옥재는 다시 궁궐 내 도서관으로 고종이 세웠던 의미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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