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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놓은 정조, 한강을 꼭 건너야 했던 이유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38) 정조와 배다리
2016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행사에서 능행차 행렬이 배다리를 건너고 있다.
1776년 노론의 집요한 반대를 뚫고 왕위에 오른 이후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숭을 위한 사업에 힘을 쏟았다. 1789년에는 양주 배봉산(현재의 서울시립대학교 근처)에 있던 무덤을 수원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그리고 현륭원에 원래 거처했던 화산(花山)의 주민들은 신도시로 이주를 시켰는데, 이곳이 바로 화성(華城)이다.
정조는 아버지 묘소를 옮긴 이후 자주 행차에 나섰는데, 가장 큰 어려움이 대규모 행차가 한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정조의 주교(舟橋:배다리 건설) 프로젝트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조는 아버지 묘소를 옮긴 이후 자주 행차에 나섰는데, 가장 큰 어려움이 대규모 행차가 한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정조의 주교(舟橋:배다리 건설) 프로젝트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용양봉저정 앞에 남아있는 주교사터 표지석
정조, 『주교지남』을 편찬하다
정조 이전에도 배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넌 적이 있었다. 중종이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가 묻힌 선릉(宣陵)을 참배하기 위해 배로 다리를 건넌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조는 대규모 인원이 참여하는 행차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새로운 배다리의 건설을 지시하였다.
1789년 배다리 건설을 주관하는 관청인 주교사(舟橋司)가 설치되었고, 『주교절목(舟橋節目)』을 만들어 정조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그 계획이 치밀하지 못하다고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직접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써서 배다리를 놓는 기본 원칙을 제시하였다.
1790년(정조 14) 7월 17일의 『정조실록』에는 “배다리(舟橋)의 제도를 정하였다. 왕이 현륭원을 수원(水原)에 봉안하고 1년에 한 번씩 참배할 차비를 하였는데, 한강을 건너는 데 있어 옛 규례에는 용의 모양을 한 배(龍舟)를 사용하였으나 그 방법이 불편한 점이 많다 하여 배다리의 제도로 개정하고 신하들에게 그 세목을 만들어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상의 뜻에 맞지 않았다. 이에 왕이 직접 생각해내어 『주교지남』을 만들었다.”고 기록하여, 정조의 배다리 건설의 주요 목적이 현륭원 행차에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정조는 “배다리의 제도는 『시경(詩經)』에도 실려 있고, 사책(史冊)에도 나타나 있어 그것이 시작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역이 외지고 고루함으로 인하여 아직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한가한 여가를 이용하여 부질없이 아래와 같이 적었다. 묘당에서 지어 올린 주교사(舟橋司)의 세목을 논변하고 이어 어제문(御製文)을 첫머리에 얹혀 『주교지남』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하여, 『주교지남』을 편찬한 의도를 적시하고 있다.
이어서 배다리를 놓을 만한 지형을 언급하고 있다. “지형은 동호(東湖) 이하에서부터 노량(露梁)이 가장 적합하다. 왜냐하면 동호는 물살이 느리고 강언덕이 높은 것은 취할 만하나 강폭이 넓고 길을 돌게 되는 것이 불편하다.
빙호(冰湖)는 강폭이 좁아 취할 만하나 남쪽 언덕이 평평하고 멀어서 물이 겨우 1척만 불어도 언덕은 10척이나 물러나가게 된다. 1척 정도 되는 얕은 물에는 나머지 배를 끌어들여 보충할 수 없으므로 형편상 선창을 더 넓혀야 하겠으나 선창은 밀물이 들이쳐 원래 쌓은 제방도 지탱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새로 쌓아서야 되겠는가. 건너야 할 날짜는 이미 다가왔는데 수위의 증감을 짐작하기 어려워 한나절 동안이나 강가에서 행차를 멈추었던 지난해의 일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또 강물의 성질이 여울목의 흐름과 달라서 달리는 힘이 매우 세차고 새 물결에 충격을 받은 파도가 연결한 배에 미치게 되므로 빙호는 더욱 쓸 수 없다.
그러므로 몇 가지 좋은 점을 갖추고 있으면서 몇 가지 결함이 없는 노량이 가장 좋다. 다만 수세(水勢)가 상당히 높아 선창을 옛 제도대로 쓸 수 없는 점이 결점이다. 이것 역시 좋은 제도가 있는 만큼 염려할 것은 없다. 이제 이미 노량으로 정한 이상 마땅히 노량의 지형을 살피고 역량을 헤아려 논의해야 하겠다.”고 하여 노량에 배다리 설치를 지시하고 있음이 보인다.
1789년 배다리 건설을 주관하는 관청인 주교사(舟橋司)가 설치되었고, 『주교절목(舟橋節目)』을 만들어 정조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그 계획이 치밀하지 못하다고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직접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써서 배다리를 놓는 기본 원칙을 제시하였다.
1790년(정조 14) 7월 17일의 『정조실록』에는 “배다리(舟橋)의 제도를 정하였다. 왕이 현륭원을 수원(水原)에 봉안하고 1년에 한 번씩 참배할 차비를 하였는데, 한강을 건너는 데 있어 옛 규례에는 용의 모양을 한 배(龍舟)를 사용하였으나 그 방법이 불편한 점이 많다 하여 배다리의 제도로 개정하고 신하들에게 그 세목을 만들어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상의 뜻에 맞지 않았다. 이에 왕이 직접 생각해내어 『주교지남』을 만들었다.”고 기록하여, 정조의 배다리 건설의 주요 목적이 현륭원 행차에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정조는 “배다리의 제도는 『시경(詩經)』에도 실려 있고, 사책(史冊)에도 나타나 있어 그것이 시작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역이 외지고 고루함으로 인하여 아직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한가한 여가를 이용하여 부질없이 아래와 같이 적었다. 묘당에서 지어 올린 주교사(舟橋司)의 세목을 논변하고 이어 어제문(御製文)을 첫머리에 얹혀 『주교지남』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하여, 『주교지남』을 편찬한 의도를 적시하고 있다.
이어서 배다리를 놓을 만한 지형을 언급하고 있다. “지형은 동호(東湖) 이하에서부터 노량(露梁)이 가장 적합하다. 왜냐하면 동호는 물살이 느리고 강언덕이 높은 것은 취할 만하나 강폭이 넓고 길을 돌게 되는 것이 불편하다.
빙호(冰湖)는 강폭이 좁아 취할 만하나 남쪽 언덕이 평평하고 멀어서 물이 겨우 1척만 불어도 언덕은 10척이나 물러나가게 된다. 1척 정도 되는 얕은 물에는 나머지 배를 끌어들여 보충할 수 없으므로 형편상 선창을 더 넓혀야 하겠으나 선창은 밀물이 들이쳐 원래 쌓은 제방도 지탱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새로 쌓아서야 되겠는가. 건너야 할 날짜는 이미 다가왔는데 수위의 증감을 짐작하기 어려워 한나절 동안이나 강가에서 행차를 멈추었던 지난해의 일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또 강물의 성질이 여울목의 흐름과 달라서 달리는 힘이 매우 세차고 새 물결에 충격을 받은 파도가 연결한 배에 미치게 되므로 빙호는 더욱 쓸 수 없다.
그러므로 몇 가지 좋은 점을 갖추고 있으면서 몇 가지 결함이 없는 노량이 가장 좋다. 다만 수세(水勢)가 상당히 높아 선창을 옛 제도대로 쓸 수 없는 점이 결점이다. 이것 역시 좋은 제도가 있는 만큼 염려할 것은 없다. 이제 이미 노량으로 정한 이상 마땅히 노량의 지형을 살피고 역량을 헤아려 논의해야 하겠다.”고 하여 노량에 배다리 설치를 지시하고 있음이 보인다.
1795년 대규모 어가 행렬이 배다리를 건너다
정조는 1795년 윤2월 화성 행궁(行宮:왕이 임시로 머무는 궁궐)에서 거행할 어머니(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화성 행차를 계획하였고, 배다리 역시 이에 걸맞은 규모로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정조의 명을 받은 서용보(徐龍輔), 정약용(丁若鏞) 등은 1795년 2월 24일 『주교지남』을 바탕으로 조선 최고의 배다리 건설 프로젝트를 완성하였다.
동호(東湖:현재의 동호대교 일대), 빙호(冰湖:지금의 동빙고, 서빙고 지역) 등이 물망에 올랐으나, 정조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은 노량이었다. 노량은 양쪽 언덕이 높고 수심이 깊으며, 물의 흐름이 빠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강폭도 좁아서 배다리 건설에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근대식 철교로 1900년에 완성된 한강철교의 구간이 용산과 노량진임을 고려하면, 정조 시대 과학과 건설 수준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정조의 명을 받은 서용보(徐龍輔), 정약용(丁若鏞) 등은 1795년 2월 24일 『주교지남』을 바탕으로 조선 최고의 배다리 건설 프로젝트를 완성하였다.
동호(東湖:현재의 동호대교 일대), 빙호(冰湖:지금의 동빙고, 서빙고 지역) 등이 물망에 올랐으나, 정조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은 노량이었다. 노량은 양쪽 언덕이 높고 수심이 깊으며, 물의 흐름이 빠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강폭도 좁아서 배다리 건설에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근대식 철교로 1900년에 완성된 한강철교의 구간이 용산과 노량진임을 고려하면, 정조 시대 과학과 건설 수준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용양봉저정에서 내려다 본 한강대교와 노들섬
배다리에 활용된 배는 조세 운반선, 훈련도감에 소속된 배, 그리고 한강을 드나드는 경강선(京江船)이었다. 경강은 한강 가운데에서도 한성부가 주관하는 광진(廣津)에서 양화진(楊花津)까지의 한양 남부를 끼고 흐르는 부분을 말한다. 새로 배를 만들지 않고, 기존에 세곡(稅穀)이나 어물, 소금의 운송을 담당하던 배를 활용하여 비용의 낭비를 막은 것이다.
『주교지남』에는 정조가 직접 배의 선택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지금의 의견에 의하면 앞으로 아산(牙山)의 조세 운반선과 훈련도감의 배 수십 척을 가져다가 강복판에 쓰고 양쪽 가장자리에는 소금배로 충당해 쓰겠다고 하나, 소금배는 뱃전이 얕고 밑바닥이 좁아서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5개 강(서울의 한강, 용산, 마포, 현호, 서강)의 배를 통괄하여 그 수용할 숫자를 헤아리고, 배의 높낮이의 순서를 갈라 그 완전하고 좋은 배를 골라 일정한 기호를 정해놓고 훼손될 때마다 보충하며 편리한 대로 참작 대처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고 하여 경강선을 적극 활용하여 배다리를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
정조는 “배다리에 필요한 배는 나라의 배와 개인의 배를 섞어서 써야만 부족할 우려가 없다. 나라의 배는 훈련원의 배 10척과 아산(牙山) 공진창(貢津倉)의 조운선 12척을 쓰고 개인의 배는 서울 부근 포구의 배를 쓰는데, 혹시 큰물이 져서 나루가 불어날 때를 당할 경우 또한 예비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되는 만큼 서울 부근 포구의 배 10척만 더 정비해 둔다.”고 하여, 나라의 배와 개인의 배를 섞어 배다리를 만들도록 하였다.
배는 가로로 엇갈린 형태로 배치한 다음 이들 배를 막대기로 연결하여 전체가 하나로 연결될 수 있게 하였다. 배다리는 가운데가 높은 아치형으로 제작되었다. 가운데에 큰 배를 설치하고 남과 북 단계적으로 조금씩 작은 배들을 설치하였다.
배들의 설치가 끝난 후에는 소나무 판자를 이용하여 횡판(橫板:배를 가로지르는 판자)을 만들었고, 송판 위에는 사초(莎草:잔디)를 깔았다.
『주교지남』에는 “배 자체의 대소에 따라 차례대로 이어붙인 다음에 닻을 내려 단단히 고정시키고 굵은 칡줄로 동이며, 또 크고 둥근 고리로 각 배의 상하 좌우를 연결하고 가는 칡줄로 꿰어 처맨 다음, 위에는 길이로 연결된 나무를 깔고 가로로 긴 송판을 깔고서 모두 간간이 크고 작은 못을 친다. 다음 빈 가마니를 펴 흙을 채우고 잔디를 입히며, 양쪽 가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한계를 만든다. 그리고 배마다 사공 3명씩 나누어 배치하여 불을 단속하고 물을 방지하도록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배다리의 폭은 24척(약 7.2미터)이었다. 김홍도(金弘道)가 주관하여 정조가 한강을 건너는 장면을 그린 「주교도(舟橋圖)」를 보면 최대 9명의 사람이 일렬로 한강을 건너는 것을 볼 수 있다. 배다리의 양편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안전성을 꾀하였다.
배다리의 양 끝과 중간 부분에 세 개의 홍살문을 세웠다. 홍살문은 다리의 시작과 끝, 다리의 중심을 표시함과 동시에 왕이 행차하는 신성한 공간임을 강조하였다.
1795년 윤2월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을 위해 화성 행차를 단행하기에 앞서 최고의 배다리 건설을 지시하였고 그 완성을 보았다. 당시 건설된 배다리의 설계 과정은 『주교절목』과 『주교지남』을 통해 기록으로 정리되었으며, 김홍도가 그린 8폭의 「수원능행도(水原陵行圖)」 병풍 그림 중의 하나인 「주교도」에는 대규모의 어가 행렬이 용산에서 한강을 건너 노량진으로 향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정조의 효심과 과학 사상이 바탕이 된 한강의 배다리. 그리고 정조의 지침을 완벽한 배다리 건설로 화답한 관료들과 장인(匠人), 그리고 경강 상인, 이들 모두의 합작으로 조선 최고의 배다리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을 수 있었다.
『주교지남』에는 정조가 직접 배의 선택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지금의 의견에 의하면 앞으로 아산(牙山)의 조세 운반선과 훈련도감의 배 수십 척을 가져다가 강복판에 쓰고 양쪽 가장자리에는 소금배로 충당해 쓰겠다고 하나, 소금배는 뱃전이 얕고 밑바닥이 좁아서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5개 강(서울의 한강, 용산, 마포, 현호, 서강)의 배를 통괄하여 그 수용할 숫자를 헤아리고, 배의 높낮이의 순서를 갈라 그 완전하고 좋은 배를 골라 일정한 기호를 정해놓고 훼손될 때마다 보충하며 편리한 대로 참작 대처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고 하여 경강선을 적극 활용하여 배다리를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
정조는 “배다리에 필요한 배는 나라의 배와 개인의 배를 섞어서 써야만 부족할 우려가 없다. 나라의 배는 훈련원의 배 10척과 아산(牙山) 공진창(貢津倉)의 조운선 12척을 쓰고 개인의 배는 서울 부근 포구의 배를 쓰는데, 혹시 큰물이 져서 나루가 불어날 때를 당할 경우 또한 예비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되는 만큼 서울 부근 포구의 배 10척만 더 정비해 둔다.”고 하여, 나라의 배와 개인의 배를 섞어 배다리를 만들도록 하였다.
배는 가로로 엇갈린 형태로 배치한 다음 이들 배를 막대기로 연결하여 전체가 하나로 연결될 수 있게 하였다. 배다리는 가운데가 높은 아치형으로 제작되었다. 가운데에 큰 배를 설치하고 남과 북 단계적으로 조금씩 작은 배들을 설치하였다.
배들의 설치가 끝난 후에는 소나무 판자를 이용하여 횡판(橫板:배를 가로지르는 판자)을 만들었고, 송판 위에는 사초(莎草:잔디)를 깔았다.
『주교지남』에는 “배 자체의 대소에 따라 차례대로 이어붙인 다음에 닻을 내려 단단히 고정시키고 굵은 칡줄로 동이며, 또 크고 둥근 고리로 각 배의 상하 좌우를 연결하고 가는 칡줄로 꿰어 처맨 다음, 위에는 길이로 연결된 나무를 깔고 가로로 긴 송판을 깔고서 모두 간간이 크고 작은 못을 친다. 다음 빈 가마니를 펴 흙을 채우고 잔디를 입히며, 양쪽 가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한계를 만든다. 그리고 배마다 사공 3명씩 나누어 배치하여 불을 단속하고 물을 방지하도록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배다리의 폭은 24척(약 7.2미터)이었다. 김홍도(金弘道)가 주관하여 정조가 한강을 건너는 장면을 그린 「주교도(舟橋圖)」를 보면 최대 9명의 사람이 일렬로 한강을 건너는 것을 볼 수 있다. 배다리의 양편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안전성을 꾀하였다.
배다리의 양 끝과 중간 부분에 세 개의 홍살문을 세웠다. 홍살문은 다리의 시작과 끝, 다리의 중심을 표시함과 동시에 왕이 행차하는 신성한 공간임을 강조하였다.
1795년 윤2월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을 위해 화성 행차를 단행하기에 앞서 최고의 배다리 건설을 지시하였고 그 완성을 보았다. 당시 건설된 배다리의 설계 과정은 『주교절목』과 『주교지남』을 통해 기록으로 정리되었으며, 김홍도가 그린 8폭의 「수원능행도(水原陵行圖)」 병풍 그림 중의 하나인 「주교도」에는 대규모의 어가 행렬이 용산에서 한강을 건너 노량진으로 향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정조의 효심과 과학 사상이 바탕이 된 한강의 배다리. 그리고 정조의 지침을 완벽한 배다리 건설로 화답한 관료들과 장인(匠人), 그리고 경강 상인, 이들 모두의 합작으로 조선 최고의 배다리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을 수 있었다.
수원능행도(화성능행도) 병풍 제1폭(국립고궁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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