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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

세종의 무덤이 서울에 있었다고? 조선왕릉에 얽힌 이야기

by 준~ 2024.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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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무덤이 서울에 있었다고? 조선왕릉에 얽힌 이야기

서울시대표소통포털 - 내 손안에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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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과 원경왕후를 모신 헌릉 전경.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81) 서울에 소재한 조선왕릉

끝날 것 같지 않던 무더위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어느덧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가을이 왔음을 실감한다. 가을날 찾아보기 좋은 곳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된 조선의 왕릉들이다. 서울 곳곳에는 의외로 많은 조선왕릉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서울에 이처럼 많은 왕릉이 있게 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2009년 조선의 왕과 왕비의 무덤인 조선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왕릉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왕릉은 모두 비슷비슷하게 생겨 특별한 것이 없다는 선입견으로 각 왕릉의 특징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왕릉을 조성한 지역과 곁에 묻힌 인물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으며, 왕릉 주변에 조성된 석물을 통해서는 건축미와 미술사의 흐름까지 읽을 수가 있다.

왕릉은 추존된 왕과 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을 지칭한다. 왕의 사친(私親)이나 왕세자(세자빈)의 무덤은 ‘원(園)’이라고 칭하였다. 사도세자의 무덤이 현륭원(顯隆園)이었다가, 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융릉(隆陵)’으로 능호가 바뀐 것은 능과 원의 위상 차이를 보여준다. 왕으로 있다가 폐위된 경우에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등의 무덤처럼 ‘묘(墓)’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연산군 묘’나 ‘광해군 묘’의 호칭은 조선시대적 관점이 현대에도 이어진 경우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왕릉 조성에서 가장 크게 고려된 것은 풍수지리 지역적 근접성이었다.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면서도 서울에서 멀지 않는 곳이 적합하였다. 후대 왕들이 선왕의 능을 자주 참배하기에 편리한 지역을 골랐다. 현재 남아있는 왕릉이 18개 지역에 흩어져 있지만, 대부분 서울과 구리, 고양, 파주 등 경기 북부 지역에 분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한강 이남에 조성된 왕릉이 적은 것은 뱃길을 이용하는 부담을 고려해서였다. 또한 동구릉이나 서오릉, 서삼릉처럼 왕실의 무덤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지역이 주목되는데, 이 지역이 명당이라는 점과 선왕의 무덤에 함께 묻히고 싶어 하는 후대 왕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시대 왕릉은 죽기 전 왕이 뜻하는 대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무덤을 조성하는 주체인 후대 왕의 생각과 정치적 상황, 신하들 의견 등 여러 변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릉 조성 과정에는 풍수지리적 측면 외에도, 정치적 역학 관계, 정비와 계비의 갈등 등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했음은 왕릉 중 상당수가 처음의 무덤에서 옮겨지는 천릉(遷陵)을 한 상황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서울에 소재한 조선의 첫 왕릉은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정릉이다.

처음부터 서울에 소재했던 정릉 이야기

서울에 소재한 조선의 첫 왕릉은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정릉(貞陵)이다. 신덕왕후는 1396년(태조 5) 8월 13일 취현방(聚賢坊:현재의 세종대로 삼성본관 인근)에 있었던 판내시부사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이득분의 집에서 승하한 것은 병환이 위독하여 거처를 이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신덕왕후 승하 후 태조는 직접 무덤 자리를 살펴보았고, 현재의 덕수궁 인근에 조성되어 정릉(貞陵)이라 하였다. 1397년 1월 3일 『태조실록』에는 “신덕왕후를 취현방 북녘 언덕에 장례하고 정릉(貞陵)이라 이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복궁에서도 늘 왕비의 무덤을 보고 언제나 찾아가겠다는 태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파격적으로 도심 한복판에 조성될 수 있었다.
중종이 잠든 정릉 정자각에서 보는 홍살문
실제 태조는 자주 왕비의 무덤을 찾았다. 처음 조성될 때부터 한성부에 조성된 왕릉은 정릉이 유일하며, 현재의 서울시에 소재한 다른 왕릉들은 모두 조선시대에는 경기도에 속한 지역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왕이 된 후 정릉은 파묘(破墓) 후 이전되는 수난을 겪었다.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이 첫 왕세자로 책봉된 것에 반발하여 1398년 왕자의 난을 일으켰던 이방원은 경복궁에서 빤히 보이는 정릉이 보기 싫었을 것이다. 

태조가 승하하는 시기를 기다린 태종은 1409년(태종 9) 정릉을 사을한리(沙乙閑里:현재의 성북구 정릉동)로 옮겼다. 사을한리는 당시 경기도 양주군(楊州郡)에 속하였다. 태종이 정릉 천릉의 가부를 논의하게 하였고, 대신들은 태종의 뜻을 받들어, “옛 제왕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使臣)이 묵는 관사(館舍)에 가까우니,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라는 대답을 했다.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 것과, 중국 사신이 머무는 숙소인 태평관과 가까운 것을 주요한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정릉 다음으로 현재의 서울에 조성된 왕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쌍릉인 헌릉(獻陵)이다.

세종의 무덤이 처음에는 현재의 서울에 있었던 사연은?

정릉 다음으로 현재의 서울에 조성된 왕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쌍릉인 헌릉(獻陵)이다. 1420년(세종2) 7월 10일 어머니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수강궁(壽康宮)에서 56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세종은 9월 7일 광주(廣州) 대모산(大母山)에 천광(穿壙)을 하고 무덤을 조성하고 헌릉이라 하였다.

태종이 일찍이 이양달을 시켜 수릉(壽陵:죽기 전에 미리 잡는 무덤)을 살펴보았다가 얻은 땅이었는데, 태종은 “조금 동쪽으로 하고 그 오른편을 비어 두어서 나의 백세(百歲) 뒤에 쓰게 하라.”고 하였다. 2년 후인 1422년에 태종이 승하한 후 그 빈자리에 무덤을 조성함으로써 동원이봉(同原異封)의 쌍릉이 되었다. 헌릉은 원래 경기도 광주 땅에 조성되었으나, 서울의 도시 확대로 인하여 현재는 서초구 내곡동 소재가 되었다.

세종은 헌릉을 조성한 후, 1438년(세종 20) 10월 자신의 수릉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옆자리에 잡았다. 1446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세종은 헌릉 옆에 무덤을 조성하고 영릉(英陵)이라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묻힐 자리도 비워 두었다. 1450년 2월 세종 승하 후 문종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헌릉 서편 세종이 미리 무덤 자리를 잡아 둔 곳에 세종의 영릉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세종의 영릉은 세조 때부터 길흉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다. 특히 최양선이 말한 ‘절사손장자(絶嗣損長子:후사가 끊어지고 장자가 희생된다.)’ 발언이 예언처럼 문종, 단종, 의경세자(세조의 장자)에게 적용되자, 세조는 천릉을 적극 추진하였다. 세조는 세종 생전에 안평대군과 함께 세종의 수릉 터를 직접 찾기도 했기 때문에 영릉이 흉당이라는 것에 큰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세조의 천릉 노력은, 세조의 뜻을 이어받은 예종 때에 영릉의 여주 천릉으로 결실을 보았다.

강남의 중심에 위치한 선릉 이야기

강남의 중심지에 자리를 잡고 있고, ‘선릉’, ‘선정릉역’이라는 지하철 역명으로 익히 알려진 성종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 두 왕릉도 원래 조성이 될 때는 경기도 광주 지역이었으나, 현재는 서울시에 소재한 왕릉이다. 1494년(성종 25) 12월 24일 성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선릉의 서쪽 언덕에 자리한 성종의 능 전체 모습.
연산군은 5개월 국장을 마친 후인 1495년 4월 6일 경기도 광주부(廣州府) 서면 학당리 언덕에 성종의 선릉(宣陵)을 조성했다. 『성종실록』에는 ‘4월 6일에 선릉에 장사하고 혼전의 이름을 영사(永思)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웠다. 세조의 유언에 따라 세조의 광릉부터 병풍석이 세워지지 않았으나, 연산군은 성종의 무덤에 병풍석을 조성하였다. 선릉은 헌릉과 영릉에 이어, 한강을 건너 조성된 왕릉으로, 한강을 건너는 부담보다는 풍수지리적 명당을 우선시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엿볼 수가 있다. 

1530년(중종 25) 8월 22일 경복궁 동궁의 정침(正寢)에서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1462~1530) 윤씨가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무덤은 성종의 유명(遺命)에 따라 성종의 선릉 왼쪽에 동원이강릉(同原異崗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1495년(연산군 1) 1월 10일의 실록 기사에는 성종의 산릉을 정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물망에 올려놓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윤필상‧노사신‧신승선‧이극돈‧김응기‧최호원이 산릉 자리를 보고 와서 복명(復命)하는 서계에 이르기를, “광평대군(廣平大君)의 묘가 첫째요, 그 다음이 정역(鄭易)의 묘, 또 그 다음이 고양군(高陽郡) 관사(官舍)의 자리입니다.” 하였다. ... 도승지 김응기가 지리관 정명도 등을 데리고 임원준의 집에 가서 묻고, 회계(回啓)하기를, “임원준이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경성 근처의 모든 산을 두루 보았사온데, 건원릉(健元陵)‧현릉(顯陵)이라 할지라도 다 광평대군의 묘보다는 못합니다. 비록 영순군‧회원군은 일찍 죽었으나, 그 자손에는 또 번성한 집이 많습니다. ... 신의 생각으로는 광평의 묘가 제일입니다.’ 하였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그곳으로 정하라”. 하였다.
위의 논의를 통해 성종의 능은 광평대군(廣平大君:1425~1444:세종의 5남)의 묘역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왕릉 선정에 풍수적인 기준이 중시되었고, 왕의 무덤을 쓰기 위해 기존에 왕자나 사대부의 무덤을 이전시킨 상황도 볼 수 있다. 선릉이 조성되면서 광평대군의 무덤은 그의 아들 영순군(永順君)의 사패지(賜牌地)였던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현재의 대모산 기슭으로 이장되었다. 광평대군은 태조의 7남인 방번(芳蕃)의 봉사손이 되었는데, 현재 광평대군 묘역에는 광평대군 내외 묘소를 비롯하여, 이방번 내외 묘소, 광평대군의 아들 영순군(永順君) 이하 그 후손들의 묘소가 광범위하게 자리하고 있다.

현재 강남구 수서동에 자리한 광평대군의 종가는 ‘필경재(必敬齋)’이다. 필경재는 ‘반드시 웃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자세를 지니고 살라’는 뜻으로 필경재가 건립될 당시 지어진 이 고옥(古屋)의 이름이다. 필경재는 1994년에 복원이 되었는데, 조선시대 고택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1999년부터는 음식점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일대의 도로명을 ‘광평로’로 한 것에서 사후에도 이어진 광평대군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懷墓)에서 유래한 회기동,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부부 묘, 노원구에 있었던 태릉 선수촌 이름의 유래가 된 문정왕후의 태릉(泰陵),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의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에서 출발한 효창원(孝昌園) 등 무궁무진한 조선 왕실의 무덤 이야기는 다음 회에 이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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