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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

배'달'의 민족? 천년 수도 서울의 숨은 조력자 '달' 이야기

by 준~ 2024.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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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 민족? 천년 수도 서울의 숨은 조력자 '달' 이야기

서울시대표소통포털 - 내 손안에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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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16) 서울은 달의 도시
서울에 뜬 보름달. 마포대교와 남산이 보이는 서울의 야경
신라는 달의 왕국이라고 할만한 나라다. 신라 임금님이 살던 궁궐이 있던 곳의 이름부터 ‘월성(月城)’이었다. 바로 달의 성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에 ‘일월제’라고 하여 문열림이라는 일종의 제단 내지는 신전 같은 장소에서 매년 연초에 해와 달을 향해 성스러운 제사를 올리는 풍습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 실린 연오세오 이야기라는 전설에 따르면, 2천 년 전 신라에서는 여느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 우연히 해의 기운을 품고 있는 사람과 달의 기운을 품고 있는 사람이 숨어 있는데 만약 그 사람이 나라를 떠나면 그 나라의 해나 달이 빛을 잃게 된다. 해와 달에 관한 신화 중에서는 세계적으로도 아주 독특한 형태라는 느낌을 주는 줄거리인데, <삼국유사>에서는 이것이 나라에서도 큰 이야깃거리가 되어 조정이 술렁거렸던 적도 있었다고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신라에는 추석 풍습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32년에 추석 풍습이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시절, 추석은 음력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나라의 여성들이 서로 옷감짜기 대결을 한 뒤에, 8월 15일 누가 승리했는지 확인한 뒤에 잔치를 여는 행사였다고 한다. 음력 7월 16일이라면 7월 보름달이 뜬 다음 날이고, 8월 15일이면 8월 보름달이 뜨는 날이니 보름달에서 보름달까지 서로 대결하는 행사가 바로 과거의 추석이었다.

지금은 ‘명절 스트레스’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정작 초창기 신라에서 추석은 다같이 즐기며 부담 없이 노는 즐거운 축제였던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삼국사기> 기록에서 추석 행사의 절정으로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 패배한 쪽이 ‘회소곡’이라고 하는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패배한 사람이 노래 부르는 것이 가장 멋진 순서인 축제였다면 분명 유쾌하고 흥이 넘치는 날이지 않았을까?

이후에도 추석은 꾸준히 신라의 명절로 이어졌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후 시대에도 이 명절은 이어졌고 덕택에 한국인 모두에게 퍼진 것 같다. 일본인 승려가 중국 당나라에 방문한 일을 기록한 <입당구법순례행기>라는 일본 기록을 보면, 중국 당나라에 머무르던 신라 사람들이 음력 8월 15일이 되니 자기들끼리 독특한 명절 행사를 하더라는 내용이 남아 있다.

그렇게 추석을 최대의 명절로 중시하는 풍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니 <삼국사기> 기록에 따른다면, 금년 추석은 제 1993회 추석이라고 말해 볼 수도 있겠다. 가만 보면 세계의 선진국 중에 보름달이 뜨는 날을 하루 정해서 그날을 그 나라 최대의 명절로 삼는 나라는 한국 말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한국 문화는 달과 가까운 느낌이다.
세계의 선진국 중에 보름달이 뜨는 날을 하루 정해서 그날을 그 나라 최대의 명절로 삼는 나라는 한국 말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한국 문화는 달과 가까운 느낌이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달과 관련된 옛 문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없을까? 과학과 연결해 살펴본다면 서울 역시 세계 어느 나라의 수도 못지않게 달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노량진은 예로부터 해산물을 많이 파는 상인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특히 자동차나 기차가 없던 시절에는 해산물을 실은 배들이 노량진 한강 물가에 바로 들어와서 장사를 하면 인기가 많았을 것이다. 조선 후기 서울에는 이런 식으로 형성된 작은 부둣가같이 배가 들어오는 상거래 중심지가 몇 군데 있었다. 노량진 마포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였고 영등포 양화진같은 곳도 비슷한 기능을 하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서해안에서 구한 해산물을 실은 배가 한강물을 거슬러서 서울까지 올 수 있었을까? 지금이라면 연료를 넣어 작동시키는 엔진을 이용하면 커다란 배를 움직이는 것도 간단한 일이다. 그렇지만 디젤 엔진이나 증기기관이 없었던 조선 시대 이전에는 흐르는 강물의 물살을 거슬러서 배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매우 큰 고민거리였다. 돛대를 올려 바람이 받는 방식을 사용하거나 사람이 열심히 노를 젓는 방법을 사용해 볼 수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바람은 때에 따라 방향이 자꾸 바뀐다. 또 사람이 노를 젓는 일은 긴 시간 계속하기가 어렵다.
한강과 연결된 서해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크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한강과 연결된 서해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바로 세계에서도 흔치 않을 정도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크다는 특징이다. 한강물이 바다로 나아 가는 강화도 인근에는 썰물 때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바닥이 드러나는데, 밀물 때가 되면 8미터 깊이의 까마득한 바다 밑으로 변하는 곳도 있을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서해안의 짠 바닷물은 밀물 때가 되면 그 거센 밀물의 힘이 번져 나와서 한강물을 밀어 내면서 그 안쪽으로 거슬러 올라온다. 이런 식으로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많이 받는 강을 감조하천이라고 부르는데, 한강은 대표적인 감조하천이다.

짠 바닷물이 농사짓는 곳 근처로 스며 들어 오면 농작물들은 대개 소금기를 견디지 못하고 시든다. 그 때문에 감조하천은 농사 짓기에 나쁜 단점으로 취급될 때도 많다. 그렇지만 밀물과 썰물이 하루에 두 번씩 일어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고, 그 규칙을 파악하고 있으며, 그 규칙을 이용할 수 있는 도구만 개발한다면 이런 현상을 사람에게 이롭게 활용할 수도 있다. 과학은 이런 식으로 언뜻 문제거리인 현상을 역이용해서 세상에 도움이 되도록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때가 많다.

그래서 먼 옛날부터 한국인들은 한강이 감조하천이라는 점을 이용해 강물을 거슬러 배가 움직이는 데 도움을 받았다. 서해안에서 배에 생선을 가득 실은 뒤에 밀물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배를 띄우면 그 배는 자연스럽게 그 밀물을 타고 동쪽으로 움직여, 마포, 노량진까지 가는 힘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1790년 음력 7월 1일 기록에는 노량진이 하필 밀물과 썰물이 심하게 나타나는 곳이라고 적혀 있을 정도다.
서울에 뜬 슈퍼문
밀물과 썰물이 생기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달 때문이다. 달은 중력의 힘으로 지구의 바닷물을 멀리서도 조금 당길 수 있다. 그런데 달이 지구 주변을 돌고 있기 때문에 달이 지구의 물을 당기는 방향은 이리저리 바뀐다. 그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되어 어떨 때는 바닷물이 땅에서 먼 쪽으로 끌려가서 썰물이 생기고, 어떨 때는 바닷물이 땅 쪽으로 끌려와서 밀물이 생긴다. 조선 시대 기록에도 달과 밀물 썰물이 관련이 있다는 내용은 자주 등장한다. 옛사람들은 중력 이론으로 정확히 계산을 해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달이 밀물과 썰물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로부터 한강을 드나들던 배들은 달의 힘을 이용해 움직인 셈이다. 조선 시대 노량진에서 생선회를 사 먹는 사람들이 달의 힘으로 배달된 횟감을 먹었다고 말해 볼 수도 있겠다.

조선에서는 생선뿐만 아니라 나라의 수도에서 소비하는 많은 물자들을 한강을 통해 배로 운반하는 방식으로 유통했다. 아마도 한강이 조선의 고속도로였고 달이 일으키는 밀물과 썰물이 화물 차량의 엔진 역할을 했다고 말해도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세금으로 사용하는 쌀을 운반할 때 큰 배에 실어서 한강을 타고 움직이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밖의 많은 상품도 배를 이용해 움직였다.

9호선 지하철의 ‘증미역’이라는 이름이나 강서구의 ‘염창동’ 같은 지명도 이렇게 한강을 드나들던 조선 시대 유통업자들의 흔적이다. 증미라는 말은 쌀을 실은 배가 들어오다가 근처에 자꾸 사고를 낼 때가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며, 염창이라는 말은 소금을 실은 배가 강가에 들어오면 그 소금을 저장해 두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는 뜻이다.

어찌 보면 조선 시대 서울의 경제는 달의 힘으로 유지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서해안과 같이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크고 한강처럼 감조하천 현상이 잘 나타나는 지역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서울이 이런 역사를 품은 도시라는 점은 무척 재미난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시대 서울의 경제는 달의 힘으로 유지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조선 시대 보다 한참 더 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서울과 달의 인연을 상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백제의 탄생도 어쩌면 달이 일으키는 밀물과 썰물과 관련이 있을 듯 보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약 2040년 전인 기원전 18년에 고구려에서 건너온 주몽의 아들 온조가 백제를 처음 세웠다고 한다. 워낙 옛날의 일이고 전설이 많은 시대이니 모든 기록이 있는 그대로 정확한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아마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던 일이 백제가 탄생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온조 말고 그의 형제인 비류도 같이 남쪽으로 건너왔다고 되어 있다. 비류는 바닷가인 지금의 인천 인근을 근거지로 삼았고, 온조는 서울을 근거지로 삼았다고 하는데 비류의 땅은 농사가 잘되지 않아 망했고, 온조의 땅에서는 사람들이 정착하는 데 성공해서 백제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서울 송파구 석촌동고분군
현재 서울의 송파구에는 몽촌토성, 풍납토성 같은 고대의 유적이 있고 지하철 한성백제역 근처에는 ‘석촌동고분’이라고 하여 백제 시대의 커다란 무덤들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고고학자들은 바로 이 근방이 온조가 정착한 백제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리학자인 경북대학교의 이광률 교수는 예전의 한강에서 서해안 밀물이 강하게 밀려오면 잠실 근처까지 그 물살이 오는 것으로 보인다는 글을 발표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온조가 하필 잠실에 자리 잡은 이유도 어쩌면 그곳이 배를 타고 한강을 따라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 있는 가장 깊숙한 곳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상의 영역일 뿐이지만 2천년 전, 고구려에서 백제까지 내려온 사람들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을 워낙 중시했기에 비류는 아예 바닷가에 자리 잡았고, 온조는 잠실에 자리 잡았다고 추측해 보면 어떨까? 한강변에서 오랫동안 살던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한 온조는 달이 만들어 내는 밀물과 썰물의 힘만 잘 이용한다면 꼭 바닷가에 자리 잡지 않더라도 충분히 배를 이용해 강을 따라 드나들 수 있는 지역이 한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덕분에 온조는 농사도 잘되고, 더 방어하기 좋고, 더 안전한 서울의 송파구 땅을 찾아낸 것은 아닐까?

지금에 와서 증명하기는 어려운 이야기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신라 못지않게 백제도 달의 힘으로 만든 나라다. 그리고 서울은 백제 시대 400년, 조선 시대 600년, 도합 천 년을 달과 함께 번성한 도시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인 요즘은 시대가 완전히 변해서 생선은 트럭으로 배달하고, 세금은 온라인 송금으로 내는 세상이다. 그래도 밝은 달이 뜬 서울 밤하늘을 보게 되면 재미 삼아 떠올려 보기에는 괜찮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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