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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

'훈민정음 해례본'은 집 열 채 값? 우리 문화를 지킨 인물들

by 준~ 2024.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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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은 집 열 채 값? 우리 문화를 지킨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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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를 털어 민족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 선생의 옛집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72) 간송미술관과 최순우 옛집

서울에서 현재까지 근대와 현대의 문인, 예술가들의 자취가 가장 잘 남아 있는 동네가 성북동이다. 그리고 성북동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간송미술관을 꼽을 수가 있다. 간송미술관에서 걸어서 불과 5분 정도의 거리에 자리를 잡고 있는 최순우 옛집은 철거될 위기에서 시민들의 힘으로 지켜 낸 유산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문화유산 지킴이로서의 공통점도 갖고 있는 두 인물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과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1916~1984)의 삶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전형필과 보화각의 탄생

이 땅의 문화유산이 일제에 의해 쉽게 유린이 되던 일제 강점기, 개인의 몸으로 이를 지킨 사람이 있었다. 간송 전형필은 14점의 국보와 12종의 보물을 포함 5천 여점의 문화유산을 수집하여 하마터면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 냈다. 서울 종로 4가의 99칸 대가의 집 자손이었던 전형필은, 식민지 시대 조선의 현실을 고민하였다. 휘문고보에서는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高羲東)에게서 미술을 배웠으며 야구 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청소년시절부터 도서 수집에 열정적이었던 전형필은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였던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을 만나면서 삶에 큰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라는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들의 총서를 집필하고 있던 스승의 모습에 전형필은 큰 감동을 받았다. 전형필은 오세창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일제가 빼앗으려는 문화유산을 우리 땅에서 지켜낼 것을 결심하였다.
간송미술관 1층 전시장 입구. ‘보화각(葆華閣)’은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집’이라는 의미를 뜻한다.
1932년 27세의 전형필은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우리의 고서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했다. 1933년에 성북동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와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곳을 매입하였다. 간송(澗松)이라는 호와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1938년 전형필은 이곳에 박물관을 짓고 이름을 ‘보화각(葆華閣)’이라 하였다. 오세창이 지어준 이름으로서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설계를 맡은 인물은 화신백화점을 건축하기도 했던 최고의 건축가 박길룡(朴吉龍:1898~1943)이었으며, 이후 보화각에는 『동국정운(東國正韻)』(국보 71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祥節)』(국보 149호) 등 소중한 자료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입수한 것은 특히나 극적이었다.

1940년 해례본이 경북 안동의 한 고가(古家)에서 출현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소장자를 찾아 나섰고, 당시 집 10채 값에 해당하는 일만원을 지불하였다. 전형필은 한글 탄압을 일삼던 일제가 알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비밀리에 보관하였다가, 1945년 해방 후에 이를 공개했다. 이 해례본은 ‘간송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고, 국보 70호, 그리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이자 그 창제 동기가 분명히 밝혀진 『훈민정음 해례본』이 세상에 빛을 본 것에는 전형필의 노력이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전형필은 일본에까지 가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아오기도 하였다. 지금도 조선시대 풍속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신윤복의 그림이 담겨져 있는 『혜원전신첩』(국보 135호)은 전형필이 일본에서 찾아온 작품이다. 이외에도 고려청자, 조선백자, 김홍도와 정선의 그림, 김정희의 서화 등 최고의 문화재들이 전형필의 손을 거쳐 현재는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간송미술관 재개관전이 6월 16일까지 진행된다.
전형필이 사망한 후 그의 유업은 아들인 전성우와 전영우에 이어졌고, 1966년에는 전형필의 수장품을 정리,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이 발족되었다. 간송미술관은 1971년 가을 ‘겸재전(謙齋展)’을 시작으로 2014년까지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여 이곳에 소장된 대표적인 문화유산들을 소개하였다. 2008년 김홍도와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열풍 속에 전시한 신윤복의 「미인도(美人圖)」는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필자도 긴 줄을 선 끝에 미인도를 직접 보았던 기억이 있다. 이후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서, 간송문화전 시리즈로 전시를 진행하기도 했지만, 성북동 간송미술관 보화각 현장에서 전시품을 맛보는 감동을 주지는 못하였다. 간송미술관은 복원과 수리를 마치고 오랜만에 일반인에게 소장품을 공개하는 ‘보화각 1938, 간송미술관 재개관전’을 2024년 5월 1일부터 시작하여, 6월 16일까지 진행하고 있다.

전형필과 최순우의 인연

최순우는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나 개성박물관에 근무하였으며, 스승인 고유섭(高裕燮:1905~1944)의 권유로 한국미술사를 공부했다. 해방 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근무하였다. 1950년 6·25 전쟁 시기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문화유산들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북한군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 보화각을 점거한 것이다. 당시 북한은 예술인과 문학인을 비롯한 남한의 지식인들을 북한으로 데려가는 계획과 함께 문화유산의 확보에도 혈안이 되었다. 창경궁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던 적상산본(赤裳山本) 『조선왕조실록』을 가져간 것이 대표적이다.

이때 보화각에 보관되었던 문화유산을 분류하고 포장하는 임무를 맡은 인물이 최순우와 서화가 손재형(孫在馨:1903~1981)이었다. 1949년 국립박물관에 근무하면서, 문화재보존위원이었던 전형필을 알게 된 최순우는 전형필을 스승처럼, 아버지처럼 따랐다. 최순우와 손재형은 보화각 소장품들을 포장하는 일을 최대한 늦추었고, 다행히 북한군의 퇴각이 이루어지면서, 이들 문화유산들이 북한으로 가는 것을 막아냈다. 몇 달 뒤에는 중요 소장품을 부산으로 옮기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최순우 가옥 안의 중정이 한옥의 멋스러움을 더해준다.
전형필은 6·25 전쟁 시기 보화각 소장품을 지켜 준 최순우에게 큰 신뢰를 보였다. 희순(熙淳)이 본명인 그에게 자신의 아들에게 쓴 돌림자인 ‘우(雨)’를 붙여 ‘순우(淳雨)’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혜곡(兮谷)’이라는 호를 붙여준 것에서 두 사람의 신뢰와 인연을 엿볼 수가 있다.(송지영, 심지혜, 『성북동 길에서 예술을 만나다』, 연두와 파랑, 2013 참조)

최순우가 말년에 간송미술관과 지척의 거리에 집을 마련한 것에도 전형필과의 깊은 인연이 작용을 했다. 전형필은 성북동에 있을 때부터 최순우가 이곳으로 오기를 권했다. 궁정동에 살던 최순우는 이곳이 청와대 경호가 강화되어 이사를 해야 할 상황에 오자, 스승의 향기가 늘 함께하는 성북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1976년의 일이었다.
'최순우 옛집'으로 들어가는 대문. 열린 문 사이로, 안쪽 풍경이 살짝 보인다.

최순우 옛집을 찾는 즐거움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성북동 쪽으로 10분쯤 올라오면 최순우 옛집을 만날 수가 있다. 이 집은 철거가 될 뻔한 위기 속에서 시민들의 모금 운동으로 지켜 낸 집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1984년 최순우 사망 후 딸이 이곳을 지켰으나, 성북동에 빌라 건설이 추진되면서 철거가 될 상황에 빠졌다. 이때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가 되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룩했던 영국에서 1895년 시작된 이 운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산 기증과 기부를 통해 보존 가치가 높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확보하는 시민 운동이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2002년 12월 시민 성금으로 매입한 뒤 보수·복원 후 2004년 4월부터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시민운동의 성과로 최순우 옛집은 내셔널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1호가 되었다.
사랑방 위의 현판에는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문을 걸어 잠그니 바로 이곳이 깊은 산중이다)’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근대 한옥으로, ‘ㄱ’자 모양의 바깥채와 ‘ㄴ’자 모양의 안채가 맞물린 튼 ‘ㅁ’자 모양이다. 전형적인 경기 지방의 한옥 양식인데, 안채에는 사랑방, 안방, 건넌방이 있다. 집필 공간이었던 사랑방 위의 현판에는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문을 걸어 잠그니 바로 이곳이 깊은 산중이다)’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데, 선생의 글씨이다.

뒤뜰로 난 사랑방 문 위에 있는는 ‘오수당(午睡堂)’이라는 현판에는 실제 낮잠을 즐겼던 선생의 풍류가 잘 배어난다. 필자는 1년에 1~2번 이곳을 방문하는데, 무엇보다 뒤뜰의 풍경이 정겹다. 단풍나무, 밤나무, 감나무, 소나무, 자목련, 산수유, 모과, 생강, 신갈나무 등 한국을 대표하는 나무들이 있고, 뒤뜰 가운데에 하얀 달항아리를 놓고 뒤에 청죽(靑竹)을 심어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모습을 감상했다고 한다.
최순우 옛집에는 '최순우' 선생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최순우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생전에 쓴 글을 모아 1994년에 출판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가, 2002년 MBC TV 프로그램 ‘느낌표- 책,책, 책 책을 읽읍시다.’에서 권장도서로 선정되면서 최고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책을 통하여 선생의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이 더욱 평가를 받게 되었고, 선생이 말년까지 살았던 ‘최순우 옛집’도 성북동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최순우 옛집에서 문화의 향기에 취하며, 한적한 여유 시간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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